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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 찬란& 얼굴을 그려달라 해야겠다/이병률

향기로운 재스민 2016. 8. 20. 11:28



                                           풍선초



 



화분

이병률 





 그러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약속한 그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잊었거나 심한 눈비로 길이 막히어
 영 어긋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봄날이 이렇습니다, 어지럽습니다
 천지사방 마음 날리느라 
 봄날이 나비처럼 가볍습니다
 그래도 먼저 손 내민 약속인지라
 문단속에 잘 씻고 나가보지만
 한 한 시간 돌처럼 앉아있다 돌아온다면
 여한이 없겠다 싶은 날, 그런 날
 제물처럼 놓였다 재처럼 내려앉으리라
 햇살에 목숨을 내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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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이병률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은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도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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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그려달라 해야겠다
이병률  

 
세상 끝에 편의점이 있다니
무엇을 팔까  
 
장화를 팔까
얼음 가는 기계를 팔까
이 여름 냄새를 팔까  
 
여즉 문을 닫지 않았다면
그림을 그려달라고 해야겠으니
생각나는 한 사람 얼굴을 그려달라고 해야겠으니
도화지가 있느냐 물어야겠다  
 
사람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 하니  
 
주인에게 그림을 그려달라 해야겠다
얼굴 그림을 그려달라 해야겠다  
 
그 그림이 나의 얼굴이거나
혹은 한 사람의 옆얼굴이어도  
 
얼은 영혼이란 뜻이라니
굴이라는 말이 길이라는 뜻이라니  
 
세상 모든 나머지를 파는 편의점에 가서  
 
조금만 틈을 맞추고 와야겠다
세상 끝을 마주하다가 낯을 씻고
아주 조금만 인사를 하고 와야겠다 


2016. 08. 20   이병률 시인에 관한 기사를 읽은 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