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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임말, 슬픈 종착, 첫사랑, 까짓것/이정록

향기로운 재스민 2017. 8. 14. 16:08




Sailing - Guido Negraszus

 


   





높임말/이정록


커피 나오셨습니다

아메리카노 시키신 분

커피 나오셨습니다.


커피 한 잔 값이

제 시급에 맞먹지요

당연히 높임말을 써야지요

제가 뜨겁게 모시는 분이니까요.


왕관을 쓰시고

눈꽃빙수께서 나오셨습니다.

당연히 존댓말을 써야지요.

세상은 언제나 성에처럼 내치는

냉정한 얼음나라니까요.


커피가 나오시면

진동 벨에 불이 들어오실 겁니다.

천국의 맛으로 인도하실 겁니다.


엔젤 인 어스, 두손으로 잘 받드십시오.


태초에 빛이 있으셨지요.

부르르, 전율이 있으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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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종착/이정록


규직이는 좋겠다.

서른 살쯤이면 너를 더 좋아할 거야.

네 이름을 입에 달고 살 거야.

약사 세무사가 꿈인 친구도

검사 변호사 감리사 사업가가 꿈인 애들도

다들 주문처럼 네 이름만 부를 거야.

규직아, 오, 정규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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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정록


헤어진 지

열흘이 됐다.


나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을 것이다.


세월이

약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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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짓것/이정록


개업 기념 반값 이용실에 갔다가

시궁에 빠진 미운 오리 꼴이 되었다.

단골집에 가서 다시 다듬었다.

더 이상하다. 빈털터리가 되었다.

까짓것, 빡빡머리 스님도 산다.


아이들이 나만 보면 툭툭 치고 지나간다.

나보다 낫다는 걸 확인하는 거다.

까짓것, 떡갈나무는 잎이 넓어서 바람도 크다.

태평양 범고래는 덩치가 커서 마음도 넓다.


이 년 사귄 여친이 전학 온 서울 것과 사귄다.

아직 이별 문자가 없다는 건 서울 놈과는 우정이란 거다.

까짓것, 사랑과 우정도 구별 못하면 진짜 촌놈이다.

친구끼리 영화관 가고 팔짱 끼는 건 당연하다.

우정으로 마음을 가꿔서 진한 사랑으로 돌아올 거다.

까짓것, 취업이든 사랑이든 경력자 우대다.


난 어려서부터 심부름을 잘했다.

망을 잘 보고 빵과 담배를 잘 사 나른다.

까짓것, 겨울이 오기 전에 살만 조금 빼면

산타가 되어서 굴뚝도 들락거리 수 있을 거다

선물 심부름은 산타가 최고니까 말이다.


쪽지 글만 남기고 떠난 아버지 때문에

엄마가 운다. 여동생도 운다. 냉장고도 운다.

까짓것, 이라고 말하려다가 설거지하고

헛기침 날리며 피시방으로 알바 간다.

까짓것, 돈은 내가 번다.

까짓것, 가장을 해보기로 한다.


『까짓것』시집/이정록

이정록 시인이 보내는 청춘 응원가 중에서....

<창비 청소년 시선 09>



2017. 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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