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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시인의 시

향기로운 재스민 2017. 9. 8. 12:57

우리들은 포플러 / 마광수

 

 

포플러는 오늘도 몸부림쳐 날아오르고 싶어한다.

놓쳐버린 그 무엇도 없이

대지의 감미로움만으로는 아직 미흡하여

 

다만 솟구쳐 날아오르는 새가 부러워

끝간 데 없이 뻗어나간 하늘이 부러워

바람이 부러워

 

포플러는 자유의 의미도 모르는 채

언제껏 손을 쳐들고

흔들고만 있다.

 

날아오르라, 날아오르라, 날아오르라,

땅속에 묻어버린 꿈, 역사에 지친 생활의 빛에

체념, 권태로 하여 잊어버린

네 생명의 자존심 섞인 의지에 !

 

아무리 흔들어 보아도 손에 잡히지 않지만

아픔도 잊고 세월도 잊고 사랑도 잊고

포플러는 오늘도 안타깝게 손을 휘저어 본다.

 

명백히 놓쳐버린

그 무엇이라도 있다는 듯이  

 



이 별/ 마광수


흐르고 있네요, 우리의 기억들이
강물처럼, 밀물처럼, 우리의 아픔들이.
하지만 마지막 순간이 빛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은 아름다워요.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 하나요,
잊혀질 날들을 두려워 하나요.
아, 어차피 인생은 한바탕 연극인 것을.
우리의 가슴과 가슴을
다시 한번 맞대 보아요.

웃음처럼 통곡할까요,
통곡처럼 웃어볼까요.
모든 것은 꿈,
모든 것은 안개 속 꼭두각시 놀이.

당신은 저의 입술을 가지세요,
저는 당신의 마음을 먹겠어요.

눈을 감으면
잠깐씩 빛나는 무지개빛 추억 속에서
지금도 꿈꿀 수 있어요.
지금도 사랑할 수 있어요.

모든 것이 흘러가는 이 시간 속에서도
빛 바랜 언어들이 쌓여질 수 있다면
기억 속의 외로운 그림자들이
다시금 우리 가슴에 내려 앉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행복할 수 있어요.

자, 웃어요.
언제나처럼 술잔을 들며
아직은 즐거운 목소리로
아직은 사랑스런 목소리로
서로의 이름을 불러 보아요.


(시집 <일평생 연애주의> 중에서)




외로운 우산/마광수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침에 비가 와서 우산을 들고 나갔다가

비가 그치면

돌아올 땐 어김없이 손이 허전합니다.

 

함께 나갔던 그 우산,

어디엔가 떨어져 있겠죠.

주인이 찾으러 올 때를 기다리며……

 

사랑도 그런 거라네요.

사랑은 잊혀진 우산처럼 남겨져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거라네요.

 

당신, 그래도 사랑할 수 있겠어요?

 

 

마광수 시집 <야하디 얄라숑> 중에서




 

석 가(釋 迦) / 마광수

 

 

한껏 '' 밖에 다른 무엇이 더 있겠느냐

내 차라리 한낱 벙어리 였으면 좋을 것을.

인생 팔십은 너무 짧아, 내 이제 허무히 죽어가나니

뉘 있어 나를 죽음의 고통에서 구원해 주리?

수만 마디 설법(說法)들이 지금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미처 '중생'을 죽이지 못하였다.

''도 죽이지를 못하였다.

()도 악()도 미()도 추()도 죽이지를 못하였다.

 

늙고 지쳐 병들은 이 몸,

껍질만 남은 더러운 몸뚱어리를 미처 죽이지 못하였다.

아아, ()를 죽이지 못하였다.

 

그대들은 먼저 나를 죽여라,

시퍼런 비수로 내 가슴을 찌르라.

희망을 죽여라 해탈을 죽여라

 

우리들은 새로운 자유를 만들어 낼 순 없다.

다만 자유가 아닌 것들을 죽여야 할 뿐

보이는 대로 보이는 대로 죽여 없애야 할 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나한(羅漢)을 만나면 나한을 죽여라

보살(菩薩)을 만나면 보살을 죽여라

 

네 부모를 죽여라.

친척과 권속을 죽여라,

그리고 사랑을 죽여라.

너를 죽여라!

 

차라리 벙어리라면 얼마나 좋으랴

차라리 백치라면 얼마나 좋으랴

날카로운 식칼 아래, 싱싱한 펄떡임으로

핏방울 흩뿌려, 힘있게 죽어가는 생선 토막이라면,

---- 내 얼마나 좋으랴.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에서)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 / 마광수




엉거주춤 발가벗는 척 하지만 말고 
홀라당 시원하게 빨가벗고서 
너희들 마음 속 위선을 털어버려라 

모든 사람들에게 가식적 
시민의식의 구성원이 되라고 강요하지 말아라

 

귀족적인 사치와 쾌락에의 욕구가 숨어 있는 
너희들 가슴 속 욕망을 활짝 펼쳐보여야 한다 
지배계급에 대한 적의(敵意)와 투쟁은 
그들이 누리는 쾌락에 대한 선망(羨望)일 뿐 
숭고한 평등의식의 소산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

 

여인들의 거칠고 투박한 손만이
아름답다고 외치는 민중적 위선을 털어버려라 
여인의 희고 가는 손과 길디긴 손톱이 
네 가슴을 쓸어내릴 때 맛보는 쾌락을 숨기거나 
손가락질하며 힐난하는 가식덩어리들이여 
어서 가자, 야하고 솔직한 장미여관으로


  (시집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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