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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시 모음

향기로운 재스민 2017. 9. 15. 18:09


최승자


 

1952년 충남 연기

 수도여고와 고려대 독문과

계간 『문학과지성』 1979년 가을호에 「이 시대의 사랑」으로 등단

시집,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내 무덤 푸르고』

시선집, 『주변인의 초상』 등을 상자했다. 그 밖에 번역 시집 『죽음의 엘레지』

역서,『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호』 『자살 연구』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비채

 



 일찍이 나는 - 최승자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대의 사랑」(1981)


 

 

너에게 - 최승자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다.

내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목숨밖에는.

 

목숨밖에 팔 게 없는 세상,

황량한 쇼윈도 같은 창 너머로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

나는 치명적이다.

 

내게, 또 세상에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영혼의 집 쇼윈도는

텅텅 비어 있다.

텅텅 비어,

박제된 내 모가지 하나만

죽은 왕의 초상처럼 걸려 있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라고 한다.

 

 

 

외롭지 않기 위하여 - 최승자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조금 마십니다

꿈꾸지 않기 위하여

수면제를 삼킵니다

마지막으로 내 두뇌의

스위치를 끕니다

 

그러면 온밤내 시계 소리만이

빈 방을 걸어다니죠

그러나 잘 들어보세요

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

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다

 

 

 

- 최승자

마음의 뒷쪽에선 비가 내리고
그 앞에는 반짝반짝 웃는 나의 얼굴
에나멜처럼 반짝이는
저 단단한 슬픔의 이빨.

어머니 북이나 쳤으면요
내 마음의 얇은 함석 지붕을 두드리는
산란한 빗줄기보다 더 세게 더 크게,
내가 밥빌어 먹고 사는 사무실의
낮은 회색 지붕이 뚫어져라 뚫어져라.
그래서 햇살이 칼날처럼
이 회색의 급소를 찌르도록
어머니 북이나 실컷 쳐 봤으면요.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니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Y를 위하여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찬 공기도 보였어

 

하나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던 것을


그때부터야
나는 이 지상에 한 무덤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고
나의 아이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나쁜놈, 난 널 죽여 버리고 말 거야

 

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불려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다시 떠나가지 저 차가운 하늘 바다로,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오 개새끼
못 잊어!

 

 

그릇 똥값


노량진 어느 거리 그릇 세일 가게

쇼윈도에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

"그릇 똥값"


순간 충격적으로, 황금색으로

활짝 피어나는 그림 하나.

신성한 밥그릇 안에 소중하게 담겨 있는

김 모락모락 나는 커다란 똥 무더기 하나,

아니 쇼윈도 안 모든 그릇들 안에 담겨

폴폴 향기로운 김을 피워 올리는 똥덩어리들.

그 황금색의 환한 충격.

입과 항문이 한 코드로 연결되듯

밥과 똥이 한 에너지의 다른 형태들이니,

밥그릇에 똥을 퍼담은들,

밥그릇에 똥을 눈들 어떠랴,

산다는 것은 결국 싼다는 것인데

 

 

 

자화상 - 최승자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어리의 슬픔이예요.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빛 속에 저 눈부신 천성의 사람들

저이들이 마시는 순순한 술은

갈라진 이 혀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잡초나 늪 속에 온 몸을 사려감고

내 슬픔의 독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

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

나는 태양에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

 

 

 

우우, 널 버리고 싶어 : 최승자

식은 사랑 한 짐 부려놓고
그는 세상 꿈을 폭파하기 위해
나를 잠가 놓고 떠났다.
나는 도로 닫혀있다.

비인 집에서 나는
정신이 아프고
인생이 아프다.
배고픈 저녁마다
아픈 정신은
문간에 나가 앉아,
세상 꿈이 남아 있는 한
결코 돌아오지 않을 그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린다.

우우, 널 버리고 싶어
이 기다리을 벗고 싶어
돈 많은 애인을 얻고 싶어
따뜻한 무덤을 마련하고 싶어

천천히 취해 가는 술을 마시다
천천히 깨어 가는 커피를 마시면서,
아주 잘 닦여진 거울로 보면 내 얼굴이
죽음 이상으로
투명해 보인다


 파괴의 집 : 최승자

사방팔방으로 바람, 바람 소리.
바람 파도에 포위된 집,
누울 곳 없는 삼십칠 세.

없는 꿈과 있는 현실,
그 사이에서 바람 : : : : : :
바람 소리가 날 흔들어댄다.

영원히 뿌리 없는
허공의 房, 허방의 집.

허망하고 허망하여
이 집을 파괴합니다.
이 집을 복원하지 마십시오.
행여, 이 위에 기념 건물을 세우지 마십시오.
명실공히, 이 집은 파괴의 집입니다.


 여성에 관하여 : 최승자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 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흘리는 곳,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 있다.
새들의 고향은 거기.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그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근황 : 최승자

못 살겠습니다.
(실은 이만하면 잘 살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원한다면, 죽여주십시오.

생각해보면,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내 죄이며 내 업입니다.
그 죄와 그 업 때문에 지금 살아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잘 살아 있습니다.


 너에게 : 최승자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
어느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돌아와 이제 : 최승자

새들은 항상 낮게 낮게 가라앉고
산발한 그리움은 밖에서,
밖에서만 날 부르고

쉬임 없는 파문과 파문 사이에서
나는 너무 오랫동안 춤추었다.

이젠 너를 떠나야 하리.

어화 어화 우리 슬픔
여기까지 노저어 왔었나.

내 너를 큰물 가운데 두고
이제 차마 떠나야 하리.

오래 전에 내 눈 속 깊이 가라앉았던 별,
다시 떠오르는 별.
오래 갈구해온 나의 땅에
다시 피가 돌고
돌아와 이제 내 울타리를 고치느니,

허술함이여 허술함이여
버려진 잡초들이
이미 내 키를 넘었구나


 비극 : 최승자

죽고 싶음의 절정에서
죽지 못한다, 혹은
죽지 않는다.
드라마가 되지 않고
비극이 되지 않고
클라이막스가 되지 않는다.
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견뎌내야 할 비극이다.
시시하고 미미하고 지지하고 데데한 비극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물을 건너갈 수 밖에 없다.
맞은편에서 병신 같은 죽음이 날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대의 벽을 핥는다 : 최승자

나는 그대의 벽을 핥는다.
달디단 내 혀의 입맞춤에 녹아
무너져라고 무너져라고
나는 그대의 벽을 핥는다.

그러나 결코 사랑은 아니라고
깨달아지는 이 나이는 무슨 나이인가?
결코 사랑만이 아니다.
결코 사랑만으로는 태부족이다.
이런, 나는 호 혹시
테러리스트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오 꼬집어다오, 형제여, 내가 호 혹시
깡패의 순정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마흔 : 최승자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 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오늘 저녁이 먹기 싫고 : 최승자

오늘 저녁이 먹기 싫고 내일 아침이 살기 싫으니
이대로 쓰러져 잠들리라.
쥐도새도모르게 잠들어버리리라.
그러나 자고 싶어도 죽고 싶어도
누울 곳 없는 정신은 툭하면 집을 나서서
이 거리 저 골목을 기웃거리고,
살코기처럼 흥건하게 쏟아지는 불빛들.
오오 그대들 오늘도 살아 계신가.
밤나무 이파리 실뱀처럼 뒤엉켜
밤꽃들 불을 켜는 네온의 집 창가에서
나는 고아처럼 바라본다.
일촉즉발의 사랑 속에서 따스하게 숨쉬는 염통들.
그름처럼 부풀어오른 애인들의 배를 베고
여자들 남자들 하염없이 평화롭게 붕붕거리지만
흐흥 뭐해서 뭐해, 별들은 매연에 취해 찔금거리고
구슬픈 밤공기가 이별의 닐리리를 불러대는 밤거리.
올 늦가을엔 새빨간 루즈를 칠하고
내년엔 실한 아들 하나 낳을까
아니면 내일부터 단식을 시작할까
그러나 돌아와 방문을 열면
응답처럼 보복처럼, 나의 기둥서방
죽음이 나보다 먼저 누워
두 눈을 멀뚱거리고 있다.


 기억하는가 : 최승자

기억하는가
우리가 만났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 뒤척였다.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 최승자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未忘 혹은 備忘 2 : 최승자

먹지 않으려고
뱉지 않으려고
언제나 앙다물린 오관들.
그러나 언제나 삼켜지고
뱉아져나오는
이 조건 반사적 자동 반복적
삶의 쓰레기들.

목숨은 처음부터 오물이었다.


 未忘 혹은 備忘 5

어떻게 잠속으로 걸어들어가야 할 것인지.
이제 개들은 머뭇거리며 골목 안으로 꼬리를 숨기고
침묵은 오래도록 홀로 신음할 것이다.

잠으로 들어가는 저 입구가 두렵다.
검은 굴속에서 꿈은 또 물고늘어질 것이다.
꿈은 물어뜯고 물어뜯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악몽의 환각이,
두려운 생시의 파편들이 번갯불처럼 번쩍일 것이다.
한 테마의 연속적인 꿈들과
그 사이의 단절된 악몽의 환각들의 폭발.
잠으로 들어가는 저 입구가 두렵다.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독한 하이타이로
수백 번 빨아 헹구고 쥐어짠
거덜난 누더기 옷감처럼 나는 또다시
아침의 햇빛 속에 내동댕이쳐져 있을 것이다.


 未忘 혹은 備忘 8

내 무덤, 푸르고
푸르러져
푸르름 속에 함몰되어
아득히 그 흔적조차 없어졌을 때,
그 때 비로소
개울들 늘 이쁜 물소리로 가득하고
길들 모두 명상의 침묵으로 가득하리니
그때 비로소
삶 속의 죽음의 길 혹은 죽음 속의 삶의 길
새로 하나 트이지 않겠는가.


 未忘 혹은 備忘 10

비애여 네 얼굴을 보고 싶다.
네 이목구비를 보고 싶다.

(이 시대 비애의 얼굴은 무슨 부분들로 이루어진 것인지
한 사람이 한 시대가 걸어가는 그 행로 속에
이 무슨 비애의 돌덩이들이 이리도 서걱이는지)

비애여 오늘밤 꿈속에서 단 한번이라도
네 진정한 이목구비를 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확고하게 결정하고 싶다,
네 얼굴에 키스를 해줄 것인가
아니면
네 얼굴에 똥칠을 해줄 것인가를.


 악순환 : 최승자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겐 공포였다.
나는 독 안에 든 쥐였고,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쥐였고,
그래서 그 공포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였다.
어쩌면 그 때문에 세계가 나를
잡아먹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오 한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언젠가 다시 한번 : 최승자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우리가 지나쳐온,
아직도 어느 갈피에선가
흔들리고 있을 아득한 그 거리들.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다만 들이키고 들이키는
흉내를 내었을 뿐이다.
그 치욕의 잔
끝없는 나날
죽음 앞에서
한 발 앞으로
한 발 뒤로
끝없는 그 삶의 무도를
다만 흉내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너를 피해
달아나고 달아나는
흉내를 내고 있다.
어디에도 없는 너를 피해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이 세계의
어느 낯선 모퉁이에서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Serenade To Summertime - Paul Mauri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