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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의 시밭

향기로운 재스민 2017. 9. 28. 14:09
코팅, 가루 , 캡슐 / 마경덕 마경덕의 시밭

2017. 9. 15.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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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네이버 포토갤러리>'june'님

 

코팅, 가루, 캡슐


마경덕 


동굴처럼 깊고 어두운

몸의 길

물 한 모금에 주저 없이 목을 넘는 색색의 약들

달콤하고 쓴 성질대로

코팅을 하고 캡슐에 몸을 숨겼다


스스로 몸을 던지도록 훈련된

내 몸이 보낸 자객들

식후 30분, 하루 2~3회 좁은 식도를 타고 하강한다

충성심이 강한 놈은

주인을 위해 제 뼈를 곱게 갈아 바치기도 한다


얼마나 잠복하면 적을 만날지

어느 지점에서 칼을 쓸지

그들은 알고 있다

 

병마와 맞서 살아 돌아온 적은 없지만

승전, 또는 패전

그들의 전적은 수시로 보고되었다

 

무릎이 치열한 격전지다


약병에 담긴 최신 신병들

출격신호를 기다리는 중이다 


*모 문예지 가을호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편집진의 실수로 연이 바뀌어 지면에 소개되었기에 바로 잡습니다.

클립 / 마경덕 마경덕의 시밭

2017. 9. 1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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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립

마경덕

 

나무들이 파릇파릇 봄을 끼운다

가지마다

단단한 집게클립으로

 

강을 건너는 누의 클립은 악어의 아가리

종유석과 석순도 석회동굴이 클립이다

 

봄바람과 스카프가

맞물린다 정오와 식곤증과 커피가, 마트와 카트와 카드가

맥주와 치킨과 퇴근이

빌딩은 빌딩끼리, 골목은 골목을 물고 버틴다

 

몸에서 멀리 뻗어나간 각각의 발가락도 하나로 꽂혀있다

 

하늘이 새 떼를 감싸는 것도

헤어롤이 머리를 휘감는 것도 클립의 방식

 

옛 애인과 과거를 정리하지 못한

어지러운 연애들

 

클립에 끼우지 못한 결혼은 쉽게 깨진다

 

「문파문학」2017. 가을호

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 / 마경덕 마경덕의 시밭

2017. 9. 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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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

마경덕

실패한 시를 묶는다

입을 쩍 벌리는 집게클립

초원을 향해 강을 건너던 어설픈 나의 누 떼가

악어의 이빨에 물려 몇 해째 묶여있다

 

건기에 이마가 깨진 문장들, 언어의 자투리들

클립은 습작의 뒷다리를 덥석 물고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그런데,

악어의 이빨자국이 선명한 그것들이 가슴을 쿵쿵 뛰게 한다

 

시와 연애한지 17년, 시와 나의 관계는 무사한가

 

버둥거리는 물살에, 누 뒷다리 하나 던져두고

세상에 나가

일찍 죽어버린 시를 생각하는 밤

 

나는 악어의 입을 벌려 확인한다

저편으로 가지 못한 누 떼와

악어가 득실거리는 강가에서

밤새 떨고 있던 그 어린 詩의 마음을

반년간지『시에티카』 초대시 2017년 · 하반기 제17호 (시와에세이, 2017)

 

 

* 모 문예지 편집진의 실수로 퇴고 전의 작품 <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이 다른 작품과 바뀌어 '가을호'에 이중으로 실리게 되어 이 자리에서 밝힙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자명종 / 마경덕 마경덕의 시밭

2017. 9. 3.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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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종

마경덕

 

 

새벽 여섯시

요란한 울음이 곤한 잠을 흔든다

 

뚝,

손가락 하나가 자명종의 입을 묶는다

 

입을 틀어막는 순간,

가슴으로 가라앉는 울음소리

 

뚝,

울음 뚝,

 

억지로 눈물을 삼키던 때가 있었다

입술을 가로막는 단호한 손가락에 끅끅 어깨가 대신 흐느꼈다

가슴에 찰랑이던 감정의 찌꺼기는

저녁의 베개를 적시며 흘러나왔다

 

몇 해 울음이 마르지 않는 자명종

저 안에 얼마나 많은 슬픔이 고여 있을까

 

뚝, 잘린 울음은 꼬리가 길다

「착각의 시학」2017. 가을호

 

나무들의 수첩 / 마경덕 마경덕의 시밭

2017. 8. 29.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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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네이버 포토갤러리>'올리브'님

나무들의 수첩

마경덕 

 

새 한 마리 보태고 빼며 셈을 익힌 나무들

사람보다 계산이 밝다

 

옹이 많은 나무는 묵은 수첩이 여러 권이다

 

도로변에 솔방울로 유언을 적어 둔

까맣게 그을린 수첩도 있다

 

쇄골이 환히 드러난 가을은

수첩에 핏물이 든다

 

다 내놓으라는 협박에 밑동이 너덜거리는 참나무

제 몸이 수첩이다

겉표지에 적힌 고문의 흔적을 머리 검은 사람만 모르고

 

쿵, 

쿵,

돌덩이의 육중한 무게에 숲의 허벅지가 찢어진 날

바람은 하염없이 숲의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주었다

 

자리를 옮기면 자해自害하고

목을 베면 더 많은 목을 내미는 독기는

모두 수첩에게 배웠다

『여수 작가』 5호 . 2017.

식탁 모서리에 컵의 가족사가 있다 ​ / 마경덕 마경덕의 시밭

2017. 8. 26.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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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네이버 포토갤러리>'소박한'님 


식탁 모서리에 컵의 가족사가 있다

마경덕

 

한 뼘의 컵에게

마당으로 들어온 민들레 한 송이를 맡긴 적 있다

꽃의 키에 맞춰 반쯤 물을 채우고

식탁 귀퉁이를 붙잡고 버티던 사나흘

뿌리 잘린 봄의 입술이 노랗게 벌어지고

한 모금 홀짝이는 소리에 컵이 출렁거렸다

꽃에게 잡힌

절반의 시간은 꽃의 것이었다

 

제 버릇대로

물이나 주스, 또는 우유를 단숨에 쏟아 붓고

싱크대 간이선반에 나란히 줄을 서던

똑같은 유리컵들

 

식탁 모서리에 어두운 가족사가 있다

자리를 지키던 컵은

자리를 이탈한 불행을 목격했다

찰나에 뼈가 하얗게 흩어진

추락사였다

 

냉장고 문이 열릴 때마다 빈 컵의 표정이 불안하다

 

일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홀로 남은 초조한 눈빛이 나를 보고 있다

「문학나무」2017. 가을호

 

 

사슴벌레의 우울증 / 마경덕 마경덕의 시밭

2017. 8. 25.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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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네이버 포토갤러리>'피눈물'님

사슴벌레의 우울증

마경덕

 

당신은 사슴입니까

아니면 벌레입니까

두 개의 이름을 합성해 사용하면 불법입니다

 

동물의 나라

아니, 곤충의 나라에서는 말이지요

 

두 개의 턱을 뿔로 사칭한 당신의 교묘한 수법에

인간도 사슴도

모두 깜박 속았습니다

 

타인의 이름을 허락 없이 도용해

신분상승을 한 죄도 추가합니다

 

강박증도 정상참작이 되느냐고요

썩은 나무를 파먹던 과거를 지우고 싶다고요

관(冠)처럼 도도한 뿔을 보면 주눅이 든다고요

 

하긴,

인간의 세계에서도 그럴듯한 변명이 형량을 줄여주긴 하지요

 

물론,

먼저 사슴과 합의를 한다면 가능합니다

『여수 작가』 5호 . 2017.

 

총알택시 / 마경덕 마경덕의 시밭

2017. 8. 25.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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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네이버블로그>'사과나무'님 

총알택시

마경덕

 

총을 쏴 본 적은 없지만

총알의 속도는 알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 수원에서 서울로 날아오던 총알택시

 

포장마차에서 노래방으로 가라오케로

2차, 3차 흥을 장전한 남편

방아쇠를 움켜쥔 퇴근은

취기가 묻은 춤과 노래로 사정거리를 벗어나고

 

자정을 넘기고 부랴부랴 집을 향해 날아올 때

미끄러운 빗길에 조준이 빗나갈까

곤히 주무시는 하나님을 몇 번이나 흔들어 깨웠다

 

총알보다 빠른 총알택시

네 개의 바퀴는 과열된 총구처럼 달아오르고

밤늦은 귀가가 무사히 과녁에 명중할 때마다

낯선 택시에게 꾸벅 절을 했다

 

그 시퍼렇던 객기는 다 어디로 갔을까

아내의 가슴에 탄흔은 남았는데

이제 어디에도 탄피 하나 없다

 

어느새 총알을 다 써버리고

「문학나무」2017. 가을호

 

 

가짜 버스 정류장 / 마경덕 마경덕의 시밭

2017. 8. 4.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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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버스 정류장

마경덕

 

독일 치매 요양원 앞

가짜 버스 정류장

몸에 밴 그리움이 무작정 노인을 끌고 오면

벤치는 가출한 노인을

말없이

하염없이

무릎에 받아 앉힌다

돌아갈 곳도

왜 이곳에 앉아있는지도

잊어버릴 때쯤

누군가 다가와

커피 한 잔 하실까요?

친절한 한마디가 눈물을 닦아주면

벤치는 얼른 노인을 일으켜

요양원으로 돌려보낸다

생의 마지막 정류장

오늘도 막막한 기다림을

나무벤치가 다 받아준다

월간「우리詩」2017. 7월호

올해의 나이 / 마경덕 마경덕의 시밭

2017. 7. 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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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네이버 포토갤러리>'고동'님

마경덕

설렘을 포장하면

들러리로 나서는 생일양초들

케이크의 부록이다

 

오늘은 생일이 주인공, 기꺼이 몸을 바쳐야 한다

 

성냥 한 개비 먼저

단호하게 빗금을 그을 것이다

 

둘러앉은 누군가 소등을 하면

어둠 사이사이 반짝이는 눈빛들

입 안 가득 달콤한 축하를 머금고 있다

 

쏟아지는 축하노래 10초

환호와 박수 2초

 

일생 딱 한 번 누리는 절정은

12초에 끝났다

 

스쳐간 입김에

휴지에 싸여 버려지는 올해의 나이

『문예사조』2017. 7월호. 초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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