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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누구든 떠나갈 때는/ 류시화

향기로운 재스민 2011. 10. 18. 05:46

 

 

 누구든 떠나갈 때는/ 류시화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날이 흐린 날을 피해서 가자

봄이 아니라도

저 빛 눈부셔 하며 가자


누구든 떠나갈 때는

우리 함께 부르던 노래

우리 나누었던 말

강에 버리고 가자

그 말과 노래 세상을 적시도록


때로 용서하지 못하고

작별의 말조차 잊은 채로

우리는 떠나왔네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네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가자

지는 해 노을 속에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으며 가자


-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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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이유 없이 빗나간 사랑이 있었다. 그땐 눅눅한 사타구니에서 사랑이 비롯되는 줄 알았다. 무릎 위 분홍빛 탄력에 미혹된 것도, 어쩌지 못할 가벼움에 길들여진 것도 사랑도 숨죽여가며 숨어서 해야 하는 철없는 시대 탓이라 믿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함께 불렀던 노래, 나누었던 말, 강에다 다 버렸지만 세상을 적시지는 못했다. 이제 다시 강물은 흘러 용서받지 못했던 말, 함께 부르지 못한 노래, '지는 해 노을 속에 잊을 수 없는 것들' 자라지 못했던 그 사랑을 ‘레테의 강’으로 모두 흘려보내야 하리.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하지만 기어이 그 강물 마셔넘길 수는 없으리.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이동원의 노래로 듣는 정호승의 시처럼 이별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순전히 시인과 가수의 탓이지 내 사랑의 내용은 아닌 것. 내 떠나갈 때는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그저 아무 일 없었던 듯 노을 속으로 가볍게 가야겠지.

 

 

ACT4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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