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떠나갈 때는/ 류시화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날이 흐린 날을 피해서 가자
봄이 아니라도
저 빛 눈부셔 하며 가자
누구든 떠나갈 때는
우리 함께 부르던 노래
우리 나누었던 말
강에 버리고 가자
그 말과 노래 세상을 적시도록
때로 용서하지 못하고
작별의 말조차 잊은 채로
우리는 떠나왔네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네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가자
지는 해 노을 속에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으며 가자
-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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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유 없이 빗나간 사랑이 있었다. 그땐 눅눅한 사타구니에서 사랑이 비롯되는 줄 알았다. 무릎 위 분홍빛 탄력에 미혹된 것도, 어쩌지 못할 가벼움에 길들여진 것도 사랑도 숨죽여가며 숨어서 해야 하는 철없는 시대 탓이라 믿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함께 불렀던 노래, 나누었던 말, 강에다 다 버렸지만 세상을 적시지는 못했다. 이제 다시 강물은 흘러 용서받지 못했던 말, 함께 부르지 못한 노래, '지는 해 노을 속에 잊을 수 없는 것들' 자라지 못했던 그 사랑을 ‘레테의 강’으로 모두 흘려보내야 하리.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하지만 기어이 그 강물 마셔넘길 수는 없으리.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이동원의 노래로 듣는 정호승의 시처럼 이별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순전히 시인과 가수의 탓이지 내 사랑의 내용은 아닌 것. 내 떠나갈 때는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그저 아무 일 없었던 듯 노을 속으로 가볍게 가야겠지.
AC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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