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평화

[스크랩] 생(生)의 감각 / 김광섭

향기로운 재스민 2011. 11. 7. 05:44

 

 

 

 

생(生)의 감각 / 김광섭

 

여명의 종이 울린다.

새벽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졌다.

깨진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른빛은 장마에

넘쳐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서 황야에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섰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 월간 <현대문학>196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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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 비둘기’로 잘 알려진 이산 김광섭은 광복 후 한때 정치에도 참여 공보처장과 대통령 비서 등을 지냈던 분이다. 이 시는 그의 나이 예순인 1965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일주일간 혼미 상태에서 사경을 헤매다 소생한 체험을 구상화한 작품이다. 죽음 문턱까지 갔다 왔던 체험이 생을 바라보는 눈을 바뀌게 했고, 생에 대한 자각으로 생명의 부활과 인간 존재의 소중함을 이렇듯 '생의 감각'이란 시로 나타냈다.

 

 누구나 살아가며 내가 존재해야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생사를 오가는 투병 과정을 견딘 뒤의 하늘은 당연히 이전의 하늘과 달라 보일 것이며, 그 아픔을 겪고서야 살아 있다는 사실이 더욱 진하게 느껴짐은 지당한 이치일 터.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소리가 더 또렷이 들리면서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부활의 출발점인 ‘여명의 종이 울리는’ 시간은 절망의 밤으로부터 희망의 아침으로 연결되는 과도기적 시간이다. 그 시간의 보편적 정서를 넘어 생명의 부활을 신비로우면서도 담담히 바라보는 모습에서 깊은 자기 성찰과 살아 있음에 대한 강렬한 생명 의식이 엿보인다. 제대로 된 삶은 죽음 일보직전까지의 고통을 겪어봐야 한다는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몇달전 아차 하는 순간에 미끄러운 바위에서 굴러떨어져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친구의 반창고 붙인 마빡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고, 그 친구고 그 생각을 수긍했다. 

 

 여기서 ‘생(生)의 감각’이란 생에 대한 자각인 부활을 의미한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는 암담한 자기 현실, 즉 병고에도 굴하지 않고 거듭 일어서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이 시의 정점이라 하겠다. 무더기로 핀 채송화라는 표현이 생의 찬란함으로 느껴져 부활의 강열한 이미지와 함께 시적인 감동을 더해 준다. 한번 쓰러져보지 않고서는 어찌 채송화 무더기 따위로 생의 감각이 흔들리겠는가.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메모 : 채송화 무더기를 다시 볼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