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평화

[스크랩] 바람의 사생활/ 이병률

향기로운 재스민 2011. 11. 27. 07:39

 

 

바람의 사생활/ 이병률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

그러지 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도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 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 차가와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 사내를 스물, ,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 년 흘렀을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 시집 <바람의 사생활> (창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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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과 같은 사랑의 사생활이고 스치고 지나간 것들에 대한 그리움의 담담한 기록이다혈관 속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이병률 시인에겐 바람과 함께 떠도는 것이 그의 삶의 전부로 보인다. 그가 지나온 궤도에는 유럽과 남미와 중국의 대륙만이 아니다. 이 땅에서도 가만있질 못하는 기질 탓에 주말마다 기차를 타거나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어딘가로 떠나야 직성이 풀리는 그다. 언젠가 어느 문학상 시상식에서의 유인물에는 그의 연보가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영화사 전전, 방송사 전전, 잡지사 전전, 출판사 전전, 기획사 전전, 음반사 전전, 아니 전력을 다해 세계를 전전.”

 

 '전전이란 얼마나 막막한 바람으로 징징대는 유목의 습성인가. 정한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내. 그런 사내에게 붙어먹을 계집은 애당초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만남과 헤어짐의 이력을 쌓아가는 것은 필연이고 운명일 터. 떠돌이의 삶을 택한 바에야 나이 마흔을 훌쩍 넘겨서도 아직 독신인 것은 어쩌면 다행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같은 유전자의 상대를 만나지 못하는 한 온전한 가정생활이 담보되지 않겠기에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스친 자리가 그립고 두고 온 자리가 그립다고 한다. 거대한 시간을 견디는 자가 할 일은 그리움이 전부, 저 건너가 그립다는 것이다.

 

 그는 길에서 웅크리고 자는 사이에 시인이 되었고 말한다. 그리고선 곧장 여행을 떠났으며 여행에서 돌아올 때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여전히 남아 있는 야생의 습관은 그의 삶을 몰입토록 하고 맹렬하게 달군다. 그는 헤어짐을 거듭하며 시를 짓는 시인이다. 삶과 풍경과 시간 속으로 스미면서 말을 빚어낸다. 그에게 바람은 보편타당한 삶의 실체이고 진실인 것이다. 언젠가는 당신을 떠나게 되리라는 예감이 있고, 그 예감을 스스로 불편해하면서 그 불안함에 상처받는 당신을 위해 우는 갸륵함도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얄밉지만 약하고 슬픈 남자의 시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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