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하늘

[스크랩] <작품집 깊이 읽기> 이석현 시집 <둥근 소리의 힘> - 굴렁쇠 소년/ 권순진 엮음

향기로운 재스민 2012. 2. 8. 17:04

<작품집 깊이 읽기> 이석현 시집 <둥근 소리의 힘> - <시하늘> 2011년 봄호


굴렁쇠 소년                                                  권순진 엮음


 88서울올림픽 때 굴렁쇠 퍼포먼스를 기획한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둥근 굴렁쇠와 순수한 어린아이, 아무런 음향효과 없이 그 원을 굴리며 달리는 모습에다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세계가 평화로 화합하자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한다. 소년에게 어떤 세상을 만들어 줘야 할까를 함께 고민해보자는 의미와 함께 침묵과 비움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여백의 미’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석현 시인을 개인적으로 처음 만난 게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쯤 한 친목모임에서였다. 시인이라면 무조건 우러러보이고 시인 근처엔 얼씬도 못해 보았던 나와는 달리 이석현은 당시 정식등단을 한 건 아니지만 시를 열심히 공부하고 사랑하면서 곧잘 자작시를 낭독하기도 했던 진짜 시인이었다. 그때의 그 모습이 내게는 순진무구한 굴렁쇠 소년처럼 보였다.


 굴렁쇠는 굴리지 않으면 그냥 동그란 쇠붙이에 불과하며, 열심히 구르는 굴렁쇠도 조금만 방심하여 중심을 잃게 되면 금세 넘어지고 만다. 이석현 시인은 지금껏 한결같이 그 굴렁쇠를 굴리는 모습으로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살다보면 때로는 멈추고 싶을 때나 다른 길로 접어들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인데, 그의 시를 부여잡고 있는 모습이나 삶에 대한 태도를 보면 영락없이 굴렁쇠 소년이다.


 33년 넘게 제철소에 몸담아 일하면서 그가 만들어낸 쇠의 무게가 무려 3만 톤이 넘고, 3천도의 고온 속에서 쇠를 단련하듯 시심을 달구고 녹이고 굳혀 빚어낸 시편을 묶기까지의 전 과정이 굴렁쇠 소년을 은유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생산현장에 근로하면서 시를 쓰는 시인이긴 하지만 노동자 시인으로 규정짓기에는 무리가 있는 그는 엔지니어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한 업계의 고급 인력이다. 


 그의 시 쓰기는 삶과 시가 밧줄처럼 하나로 엮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다양성을 확보하고 개성적 새로움과 조화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글은 사람’이라는 명제가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진 않지만 그에게는 딱 들어맞는 말이다. 이석현 시인은 자신의 삶을 향도하는 것이 바로 시라고 믿으며, 시의 이력은 고스란히 시인이 살아온 발자취라 하겠다. 그 자취가 단아하고 진솔하며 때로는 쓸쓸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시인은 때때로 우리가 안온하다고 믿고 있는 현실이 과연 정당한지를 캐묻고 있다. 시인의 평범한듯하지만 곁눈질 않고 꿋꿋하게 앞을 보며 치열하게 살아온 삶이 단단한 사유의 결을 이루어 균형과 조화의 올곧은 방향을 모색한다. 거기에다 단편적 사고에서 벗어난 유연함을 추가해 둥근 소리를 완성해 가는데, 그 소리는 갈등과 대립을 극복한 진정한 평화의 목청이다.


 시인은 오늘도 삶 자체를 시적 공간으로 활용하면서 철의 연금술로 시를 빚고 그 소리를 염원하고 있다. 그의 시편들이 묶인 첫 시집 <둥근 소리의 힘>은 총체적 인간의 함량이고, 그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기도 하다.


 이석현 시인은 예나 지금이나 굴렁쇠를 열심히 굴리고 있는 소년의 모습 그대로다. 고재종 시인은 표사에서 “그를 일러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명명할 때 사방 어디에선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 소리가 어찌 아니 들려오랴”고 했다. 그 힘을 입증해 보이려는 그와 그의 삶, 그의 시가 모두 아름답고 믿음직하다.


 

<용접>


온몸으로 젖어 본 사람은 알 수 있지


보안경 너머로

삼천도 불꽃물의 길을 터주면

두툼한 방열복 속으로

후끈 스며들던 고열의 마음들


서로 녹아 넘치도록 혼절해야만

한 몸 되는 힘겨운 접목

뼈와 살을 녹여내는 아픔을

나눈 후 태어난 신생


기억을 가로지르는 고압선에서 나온

수 많은 불티들을

온 가슴으로 막아내다가

지나온 길을 더듬어 균열을 살핀다.


마음과 마음을 묶는 일이

얼마나 뜨거운 일인지

시뻘겋게 달아

온 몸으로 젖어 본 사람은 알 수가 있지.



<천정에 사는 남자>


천정에서 25년째 일하는 남자가 있 다.

곧은 길보다는

굽은 길을 더 좋아하는 중년의 나이

오직 그가 갈 수 있는 길은

곧은 직선의 길뿐이다

벽 유리로 3면이 막힌

엘리베이터만한 허공운전실

그 안에서 하루 3할을 혼자 일한다

고독이란 말은 그에게는 사치.

졸면 죽는다, 라는 슬로건이 보이는

등의자에서 잠깐 어깨를 펴면서

그는 아득한 옛날을 생각한다

누나 등에 업히거나

엄마 팔에 안기던

그 곡선의 편안함에 대하여

오늘도 상-하-좌-우 직선만을 고집하는

천정크레인 운전석에 앉아서

무심한 콘트롤 레버에 힘을 가한다.


건물 밖 하늘 위에 보름달이

둥근 길을 혼자서 간다.

휘어진 길도 아름다워 보이는



<수당>


월급날 퇴근시간

현금은 은행으로 자동이체 되고

텅 빈 가슴, 그 속엔

덤으로 받은 목숨 값 있다


군 3년 철책선 안에서

생명수당 180원 덤으로 받았고

지금은 생산 현장에서

안전화에 안전모로 무장하고

환경안전수당을 덤으로 받는다.


이 돈은 수당手當인가

수당壽當인가



<아버지의 지게>


휴식은 몸으로부터 마음의 끈까지 풀어 줍니다

잡았던 몽키 스패너를 땅에 놓고

담배 한대를 피워 뭅니다

지게차는 힘이 정말 장사입니다

오로지 전진-후진-상승-하강 만을 고집하며

아무리 무거워도 굽어지지 않는 허리를 가진

지게차를 보고 있으면, 아버지

아버지의 지게가 생각 납니다

아버지는 무지개처럼 휘어진 허리로

꿈의 등짐을 늘 지고 다니셨습니다.

사계절 모두 업고 논으로 밭으로 산으로 들로

산처럼 쌓인 짐을 성큼 달려가

번쩍 들어 올리는 지게차를 보면서

아버지가 평생 지어오신

등짐의 무게와 조심스레 비교해 봅니다.

반질 한 등 태와 달아 헤진 밀삐

고갯길마다 무게중심을 잡아주던 지게작대기까지

나의 눈 속에서 점점 그 무게가 심어지면

휴식시간처럼 편안하게 아버지가 오셨다 가십니다

가벼운 짐마저 지기를

힘겨워 했던 나는 점점 더 작아지고



<바람을 만나다>


국립 청주박물관 제2전시실에서

기원전 300년 고대철기문화를 관람하다가

바람을 불어 넣는 손풀무로

풀무질 체험을 해본다.


어라!

철 속에도 바람이 들어야 하느니

강한 바람을 집어 넣어야

강한 철이 만들어 지느니

그래야 바람을 가르는 칼도 만들어 지느니


30년간 철공장에서

이런 저런 철을 만들어 내고도

손 풀무질 체험으로

이제 와서 그걸 깨닫다니


전시실을 나와

상당산성 골짜기로 생생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만나

바람의 노래를 들으며

몸 속 깊이 바람을 집어 넣어본다.


세상에 모든 것은 바람을 만나야 단단해 지는가.

이 바람 맞으면

약한 나의 몸 강해 지려는가



<둥근 소리의 힘>


백련사 저녁 종 소리에

눈 앞이 환해졌어요

대웅전 앞 배롱나무 꽃 송이들

입안 가득 종소리 머금었다 뱉어주니

수천의 동백 잎 좋아라 입 맞춤 합니다

손사래 치는 초록향기 받아 먹고

구강포 바닷고기 몸을 불려 튀어 오르면

동심원을 그리며 미소를 띄웁니다

둥근 소리로 구르면서

나도 깨우고 너도 깨우고

구르고 굴러 지구도 돌리고

꿈틀 거대한 힘으로 살아서 우주를 돌리는

백련사 저녁 종, 그 환한

소리 소리 소리



<모래시계>


기다림도 순간이다


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

서두르거나 다투지 말자


뒤집어 바꿔놓고 보면

앞서 가는 너 보다

내가 더 빠른 법


산다는 것은

몸에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천천히 시간을 채우는 것이다.



<바람(風)>


구만리 청 보리 곁에는 애인처럼 늘 바람이 있다


바람이 없었다면 없었을 술렁거림

술렁거림이 없었으면

고요하기만 했을, 삶


가만이 눈 맞추니

술렁술렁

흔들림의 연속이어라


바람을 맞으며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 서로 닿고 닿아서 흔들리고 흔들리면서

출렁출렁 함께 흐르는 것

흐르는 것도 출렁거리며 흘러갈 때 아름다운 법이라지


청 보리 익어가는 구만리

보리 한 알에도

흔들리며 해 뜨더니 달 진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바람에 몸 섞여

출렁출렁 흐르면서 황금으로 익어간다



<아내의 남자>


연애시절 아내의 지갑을

몰래 훔쳐 보았을 땐

은발의 리차드기어가 있었고


결혼 전,후 용모 단정했던

내 모습이 한참을

자리하고 있나 싶었는데

이내 아들 돌 사진으로 바뀌었더군


허둥대며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한참을 잊고 살다 어쩌다 열어 보니

군대 간 작은 아들이 빡빡머리

군기 바짝 든 모습이 자리했다가


얼마 전부터 파마머리 개구쟁이

외손주 녀석을 넣고 다니며

다이아반지가 생긴 듯 아내는

은근슬쩍 여기저기 자랑하더군


몇 년 주기로 바뀌는

아내의 지갑 속 남자들

누굴까 그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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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33년을 대장장이로 살았다. 옛날에는 낫 한 자루를 만들려면 7번 불구덩이에 넣고 한번에 100번 이상 망치질을 해야 했단다.

 형산강 다리를 일만 번은 넘어 다녔을까? 쇠를 제법 잘 만드는 장인으로 인정받아 외국에 불려 다니며 내 기술을 비싼 값에 팔아 보기도 했고 내가 만든 쇠의 무게만 해도 줄잡아 3만 톤은 족히 넘을 것이다.

 양질의 쇠를 만들려면 제선, 제강, 연주, 압연 공정을 거치는 동안 물과 바람을 잘 이용하고 온도를 잘 다스리고 또 읽어내야 한다.

 살아가는 일 역시 그럴 것이다. 적당량 물도 먹어가며 바람 부는 곳을 따라 가끔 여행도 하고 냉, 온탕 같은 삶의 온도도 잘 다스려가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용광로 옆에서 땀 식히던 어느 날 우연히 바람 부는 곳으로 눈 돌려 본 문학이라는 외도의 길

 이 길을 걸어가기가 아직도 낯이 설고, 부끄럽다.


<이석현> 충북 충주 출생, 2002년 <작가정신>신인상 등단,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 회원, 포항문학 회원,<시산맥>,<시하늘>회원, 현재 포스코 근무, 시집<둥근소리의 힘>, 이메일 sukhyun@hanmail.net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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