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함석헌의 <진정한 인간관계가 그리운 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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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문학사상사에서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라는 제목으로 펴낸 각계 명사들의 애송시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그 표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큰 인물이 될 수 없다. 시는 모든 예술의 원천이며, 또한 사무사(思無邪)라는 공자의 말씀처럼 순수한 지성과 아름다운 정서의 결정체다. 조선시대의 과거가 시 쓰기 시험과 다를 바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시를 사랑할 줄 모르면, 큰 인물이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부제로 손학규 이명박 정동영 등 차세대 정치지도자와 각계 인기인 등 31인의 수기라고 덧붙였다.
이글의 내용이 별반 틀린 이야기는 아닌데 ‘시를 사랑할 줄 모르면, 큰 인물이 될 수 없다’고 한 대목이 마음에 좀 걸린다. 마치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 시를 읽어야 하는 것처럼 들리고, 큰 인물이 되려면 시도 좀 읽어 두고 아는 체 하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시가 그렇게 복무되어져야 마땅한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시가 간혹 삶의 지표가 되기도 하고 내 삶을 추스르는 데 아주 유용하게 기능하는 것도 사실이니 길게 시비할 꺼리는 아니다.
당시 서울특별시장인 이명박의 애송시가 바로 함석헌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다. 이 시를 두고 이명박 대통령은 ‘그 사람이 되고자’한다며,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물음은 나의 삶 전체를 돌아보게 하는 화두가 되었고, 살아가면서 풀어 가야할 과제가 되었다. 다만 내가 한 사람에게라도 ‘그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나는 자신 있게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대통령의 신념이 묽어졌다고 보진 않지만 집권 후반기 이제 다시 꼼꼼히 이 시 읽기를 권해 드리며, 가능하면 청와대 집무실 벼름박에다 압정으로 눌러 붙여 두거나 책상 유리판 밑에 끼워 두는 것도 괜찮지 싶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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