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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꽃 피다 / 김순진

향기로운 재스민 2013. 3. 6. 17:58

 

 

무꽃 피다

 

김순진

 

지난 가을 아버지가 농사지어 주신 무를 철수세미로 닦아냈더니

뽀얀 살결이 잘 깎은 스님의 머리 같다

 

반을 잘라 숭숭 썰어 무국을 끓였다

지난 가을 승용차 트렁크에 실려 올 때

그는 무임승차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달짝지근한 무국이 부드럽게 밥 한 사발을 떠먹여주며

간밤에 마신 술기운까지 꺾어주었다

 

나머지 반 토막을 대접에 담아 물을 부어놓았다

스스로 머리를 자를 수 없었던 그가

며칠 후 새파란 싹을 틔웠다

하도 신기해 뜯어먹어 보았더니

무 특유의 매운 맛이 입안에 퍼졌다

베란다 구석 비료포대에 갇혀서도 본분을 잊지 않으려

나는 무다 나는 무다 외우고 있었나 보다

 

갈증에 물 들이켜기를 몇 대접, 꽃대가 솟으며

드디어 보랏빛을 띤 하얀 꽃 일곱 송이가 피었다

절반의 몸, 무청 잘려진 기억으로 재생해낸 꽃은

온 집안을 기차로 삼아 봄의 들녘을 달리고 있다

 

뽑히고 무청 잘리고 동강나는 아픔을 견뎌

고작 맹물만 마시며 참선에 든 무는

무아無我의 경지에 든 수도승이었나 보다

 

가끔씩 아들임을 남편임을 아버지임을 잊어온 나

이슥한 밤, 무꽃을 들여다보며

수도승을 따라 무아의 길을 걷고 있다

출처 : 한국스토리문인협회
글쓴이 : 김순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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