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꽃 피다
김순진
지난 가을 아버지가 농사지어 주신 무를 철수세미로 닦아냈더니
뽀얀 살결이 잘 깎은 스님의 머리 같다
반을 잘라 숭숭 썰어 무국을 끓였다
지난 가을 승용차 트렁크에 실려 올 때
그는 무임승차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달짝지근한 무국이 부드럽게 밥 한 사발을 떠먹여주며
간밤에 마신 술기운까지 꺾어주었다
나머지 반 토막을 대접에 담아 물을 부어놓았다
스스로 머리를 자를 수 없었던 그가
며칠 후 새파란 싹을 틔웠다
하도 신기해 뜯어먹어 보았더니
무 특유의 매운 맛이 입안에 퍼졌다
베란다 구석 비료포대에 갇혀서도 본분을 잊지 않으려
나는 무다 나는 무다 외우고 있었나 보다
갈증에 물 들이켜기를 몇 대접, 꽃대가 솟으며
드디어 보랏빛을 띤 하얀 꽃 일곱 송이가 피었다
절반의 몸, 무청 잘려진 기억으로 재생해낸 꽃은
온 집안을 기차로 삼아 봄의 들녘을 달리고 있다
뽑히고 무청 잘리고 동강나는 아픔을 견뎌
고작 맹물만 마시며 참선에 든 무는
무아無我의 경지에 든 수도승이었나 보다
가끔씩 아들임을 남편임을 아버지임을 잊어온 나
이슥한 밤, 무꽃을 들여다보며
수도승을 따라 무아의 길을 걷고 있다
출처 : 한국스토리문인협회
글쓴이 : 김순진 원글보기
메모 : 봄 학기 첫 시간 강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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