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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달집이 탄다, 숙아/ 이명윤

향기로운 재스민 2013. 2. 25. 06:02

 

 

달집이 탄다, 숙아/ 이명윤

 

 

뜬다, 뱃살 많이 나왔다며 복대 차고 다니던 열여섯 숙아, 뜬다, 방파제에 모인 사람들, 달집에 기름 뿌리고 각목 집어 드니, 바다 데굴데굴 몸 뒤척이고 넘실넘실 뜬다, 방글방글 뜬다, 숨이 턱턱 막혔던 얼굴,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던 아기가 뜬다, 막걸리 든 사람들 웃음이 허옇게 흘러내리고 쩌윽 쩍 찢어 드는 붉은 김치 가랑이 사이로 뜬다, 둥글게 솟은 그것이 살인지 달인지도 몰랐던 철부지 숙아, 애비도 모르고 이름도 못 짓고 덜컥 피었다 졌으니 달이 맞다, 숙아, 마침내 불을 놓으니 하늘 길목이 휘청거리고, 아야, 아야, 우리 아기, 대나무 끝을 붙잡는데, 이것 놓아라 이것 놓아라 대나무 귀신이 아우성치고, 뜬다, 울며불며 뜬다, 틱, 틱, 틱, 바람이 불고 귀신들 숨이 막혀 쿨럭쿨럭 팔 저으며, 아 무서버라, 아 무서버라, 도망을 가니, 꽹과리소리 장구소리, 갯바람 흔들고, 숙아, 이쁜 아기, 좋은 곳 간다, 덩실덩실 간다, 울며불며 간다, 간다,

 

- 시집「수화기 속의 여자」(삶이 보이는 창,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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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집태우기는 정월 대보름의 만월 아래 풍농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노는 풍속놀이다. 대보름은 풍요의 상징이고, 불은 모든 부정과 사악을 살라 버리는 정화의 상징이다. 보름달이 떠오르기 전에 나무로 틀을 엮고 짚을 씌운 달집을 마을 안 적당한 곳에 만들어 둔다. 시에서는 시인의 고향인 통영 해안가 방파제에서 이뤄졌다. 수평선을 차고 달이 떠오르면 둘레에 미리 대기해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집에 불을 놓는다. 풍물패가 흥을 돋우면 신명이 난 사람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며 환호한다. 불을 붙인 후 속이 비어 너무 빨리 타지 않고 오래 타도록 소나무 가지를 달집 속에 채우기도 하고 물로 적시기도 한다.

 

 예전에는 대개 마을중심 행사였지만 요즘은 달집태우기를 관공서에서 주관하고 있다. 대구만 해도 금호강 둔치 팔현 생태마을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달집태우기 행사가 있었다. 어찌 보면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코앞의 불구경이니 공인된 간 큰 불장난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한해 소망을 적은 소지들을 달집의 허리춤에 붙여 태우면서 자신의 액이 소멸되기를 함께 기원했다. 불꽃이 환하게 피어오르자 풍물놀이는 절정에 달해 술기운으로 어깨춤을 추는 사람, 고함을 지르는 사람,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로 가득이다. 달집이 잘 타오르면 풍년이 들고, 타다가 꺼지면 흉년이 든다는 속설도 있지만 오늘의 달집은 의심할 것 없이 잘 타올랐다. 더욱이 오늘은 18대 대통령 취임식 전야가 아니던가.

 

 달집이 훨훨 타오를 때 둘레의 사람들 누구의 가슴엔들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비롯해 크고 작은 소망이 없겠는가. 강바람이 불길을 흔들면서 연신 불티가 날아오르고 꽹과리소리가 고막을 뚫고 들어와 가슴을 두드릴 때는 지나온 생의 범벅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면서 얼굴을 벌겋게 달궈놓는다. 사람들의 뇌리에는 각양각색의 상념들이 오갔겠지만, 시인은 연기가 치솟는 그 사이를 헤집고 지나가던 달을 보며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달집의 잔불이 다 사그라질 때까지 가슴 깊은 골에 박힌 숙이를 떠올리며 ‘덩실덩실’ ‘울며불며’ 달을 따라갔다. 나는 더이상 시인의 곡절을 알지 못하고 이해할 필요도 없다. 불콰해진 얼굴로 오랜만에 불구경을 실컷 하고 나니 오줌이 마려웠다.

 

 

권순진

 

 
She's gone Steelheart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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