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스크랩] 불타는 말의 기하학* (외 4편) /유안진

향기로운 재스민 2013. 6. 3. 13:57

불타는 말의 기하학* (외 4편)

 

   유안진

 

 

 

쉬운 걸 굳이 어렵게 말하고

그럴듯한 거짓말로 참말만 주절대며**

당연함을 완벽하게 증명하고 싶어서

당연하지 않다고 의심해보다가

문득 문득 묻게 된다

 

유리 벽을 지나다가

니가 나니?

걷다가 흠칫 멈춰질 때마다

내가 정말 난가?

 

나는 나 아닐지도 몰라

미행하는 그림자가 의문을 부추긴다

제 그림자를 뛰어넘는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확인해야 할 것 같아

일단은 다시 본다

이단엔 생각하고 삼단에는 행동하게

 

손톱 발톱에서 땀방울이 솟는다

나는 나 아닐 때 가장 나인데

여기 아닌 거기에서 가장 나인데

불타고 난 잿더미가 가장 뜨건 목청인데.

 

 

———

* 파스칼은 『팡세』에서 詩는 불타는 기하학(幾何學)이라고 헸다. 그러나 시가 언어의 몸을 지니기 때문에 말의 기하학이라고 정의해본다.

** 장 콕토는, “시인은 항상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쟁이다(The poet is a liar who always tells the truth)."라고 했다. 그러나 원전을 못 찾아 그 출처를 밝히지 못한다.

 

 

 

추억도 환상이다

 

 

 

머리에 꽂아주던 물봉숭아 분홍 꽃이

물수제비뜨던 소년의 강물이

보낸 적 없는데 가버렸다 하지 마라

 

흐르며 머물러 깊어지는 깊이라네

여전히 물속에는 달 뜨고 별도 뜨고

예대로 물비늘 쉴 참 없이 웃어쌓는데

가기는 어디로 갔단 말이냐

 

날마다 불타는 낙조에 입는 화상이

생피냄새 비릿한 배반에 맛들이는 황홀이

다 저녁의 갈대 머리카락 바람 빗질이

다른 생애에도 딴 길로는 가지 마라

 

이별에는 한 생애가 턱없이 모자라서

사실보다도 찬란한 허구일 수밖에는

생시보다 점점 더 생생해지는데.

 

 

 

사랑, 그 이상의 사랑으로

 

 

 

아지랑이 눈빛과

휘파람에 얹힌 말과

강물에 뿌린 노래가, 사랑을 팔고 싶은 날에

 

술잔이 입술을

눈물이 눈을

더운 피가 심장을, 팔고 싶은 날에도

 

프랑스의 한 봉쇄수도원 수녀들은

붉은 포도주 ‘가시밭길’을 담그고

중국의 어느 산간 마을 노인들은

맑은 독주 ‘백년고독’을 걸러내지

 

몸이 저의 백년감옥에 수감된

영혼에게 바치고 싶은 제주(祭酒)

시인을 팔고 싶은 시의 피와 눈물을.

 

 

 

대낮이 어찌 한밤의 깊이를 헤아리겠느냐

 

 

 

녹음이 짙어지면 검푸르다

단풍도 진할수록 검붉다

깊을수록 바닷물도 검푸르고

장미도 흑장미가 가장 오묘하다

검어진다는 것은 넘어선다는 것

높이를 거꾸로 가늠하게 된다는 것

창세전의 카오스로 천현(天玄)으로

흡수되어 용해되어버린다는 것

어떤 때 얼룩도 때 얼룩일 수가 없어져버린다는 것

오묘 기묘 절묘해진다는 것인데

벌건 대낮이다

흐린 자국까지 낱낱이 까발려서 어쩌자는 거냐

버림받은 찌꺼기들 품어 안는 칠흑 슬픔

바닥 모를 용서의 깊이로 가라앉아

쿤타 긴테에서 버락 오바마까지의

검은 혁명을 음미해보자

암흑보다 깊은 한밤중이 되어서.

 

 

 

밥해주러 간다

 

 

 

적신호로 바뀐 건널목을 허둥지둥 건너는 할머니

섰던 차량들 빵빵대며 지나가고

놀라 넘어진 할머니에게

성급한 하나가 목청껏 야단친다

 

나도 시방 중요한 일 땜에 급한 거여

주저앉은 채 당당한 할머니에게

할머니가 뭔 중요한 일 있느냐는 더 큰 목청에

 

취직 못한 막내 눔 밥해주는 거

자슥 밥 먹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뭐여?

구경꾼들 표정 엄숙해진다.

 

 

 

                        —시집 『걸어서 에덴까지』

 

-------------

유안진 / 1967년 《현대문학》추천완료로 등단. 첫 시집 『달하』(1970) 이후 『봄비 한 주머니』(2000), 『다보탑을 줍다』(2004), 『거짓말로 참말하기』(2008), 『둥근 세모꼴』(2011) 등 15권의 시집을 발표.

출처 : 장미의 정원
글쓴이 : 이양덕 원글보기
메모 : 아침 신문에서 공초상으로 선정되었다고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