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하늘

뿔/변희수

향기로운 재스민 2015. 3. 12. 07:47

 

변희수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 서면 늘 바람이 거세다

조금만 불어도 윙윙, 사나운 소리를 낸다

공기의 흐름을 막아놓아서라고 했다

바람이 뿔났다, 사실

막힌 곳이 많은 우리 집에도 여러 마리 뿔이 산다

공기의 흐름이 심상잖은 날이면 서로 으르렁거린다

그런 날엔 뿔을 함부로 세우는 바람에

잠시 격리 될 뻔한 뿔도, 제 뿔에 제가 걸려 넘어진 뿔도 있다

막힌 곳이 제일 많을 것 같은 아빠는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모자 속에 뿔을 숨겨 두었다가

상한 줄도 모르고 꺼낸 적이 있다 꼭 중국산 가짜 같았다

뿔 중에서 가장 약발이 센 뿔은 단연 엄마의 뿔이다

엄마는 알래스카 순록처럼 우아하게

뿔을 장식하고 다니지만 한 번 찔리면 오래간다

TV에서 일 년에 한 번씩 뿔 갈이 하는 순록들을 보았다

순록들은 바위나 나무에 뿔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벅벅 문지르고 나서야 새로 태어난 것처럼 온순해졌다

통증의 깊이로 까맣게 익어가는 순록들의 눈망울을 보면

아니, 서로 엉덩이에 난 뿔을 뽑아주려다가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 집 뿔들을 보면 후시딘 같은 거 필요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끝없는 설원을 헤매다가 온 것 같은 밤이면

아무리 다정하게 얼굴을 맞대고 잠들어도 뿔 근처가 욱신거린다

우연히 한 우리에 갇히게 된 짐승처럼

뿔과 뿔이 엉키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

막다른 곳에 서면 예민해지는 우리 집 뿔들

툰드라의 이끼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바람의 출구를 살핀다

쓰자마자 벗어야 하는 순록들의 아름다운 관을 생각하며

나는 지금 웃자란 내 뿔을 관리하고 있는 중이다

뿔 대신 쫑긋해진 두 귀,

온순하게 한 철을 보낼 작정이다

 

-제5회 천강문학상 시 부분 대상 수상작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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