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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 이가림

향기로운 재스민 2015. 7. 17. 06:22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 번도 더 입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부재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시집『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창비,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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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숱한 대중가요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시에서도 이별의 슬픔과 그리움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다. 이 시 역시 사랑했던 사람의 부재로 인한 그리움을 애절하게 표현한 연시로 읽힌다. 지금껏 적지 않은 시에 단상을 붙여 소개해오면서 이 같은 이별과 그리움의 정서가 묻은 글도 꽤 포함되었지 싶은데 또 그리움의 가락이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한 시인에 대한 추념의 정 때문이다. 4년간 사지가 마비되는 루게릭병을 앓다가 지난 14일 저녁 시인께서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부인인 김원옥 시인은 2년 전부터 모든 사회활동을 접고 간호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남편은 평범했지만, 시에는 애정이 남달랐던 사람”이라며 “20대 초반에 등단해 거의 한평생 시를 사랑했고, 병상에 누워서도 휴대전화로 글을 쓸 정도로 애정이 많았다”고 술회했다.

 

 문단 경력이 일천한 나로서는 작품으로 말고는 한번도 뵙지 못한 분이시다. 대표시로 알려져있는 '석류'를 비롯해 몇 작품을 기억하는데 이 작품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토록 사랑의 광휘와 순도 높은 아름다움이 표현된 절창은 이별 후 긴 사유를 거친 독백에서 흔히 발견된다. 진행형의 사랑에서 ‘낭만적 너스레’이거나 어쨌거나 풍부한 형용이 구사되는 건 사실이다. 상대를 빤히 쳐다보는 앞에서는 무슨 말을 하지 못할까. 과장과 허세와 사탕발림이 난무하다보면 깊은 사랑의 절절함과 진정성을 추출해 내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이 시에서의 이별은 사별인지 그냥 생이별인지는 확실치 않다.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 등의 표현만으로 섣불리 단정 짓기도 어렵다. 정지용의 ‘유리창’과 비교하여 감상하기도 하는데 입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럴 필요까진 없겠다.

 

 더구나 이가림 시인 자신은 이 작품을 ‘우주적 상상력’으로 읽어달라고 주문하면서, 유리창을 뼈저린 인간적 아픔을 되새겨보게 하는 무서운 고독의 문지방으로 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또한 독자의 마음이리니, 이별의 밤에 하늘의 별을 보며 일천 번도 넘게 입을 맞춘 사람이 이가림 시인이라고 여겨도 어쩌지 못한다. 별은 사랑했던 사람을 대신하는 상징이면서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이다. 그 눈동자는 어느 특정인의 눈동자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모래알 같은 이름’ ‘물방울 같은 이름’은 우주적 상상력이 개입되면 한 개인을 비켜나서 읽혀지기도 할 터이다. 그러나 대개의 선량한 독자로서는 깊게 사랑했고 사무치도록 그리운 그 한 사람에 대한 마음 아니고는 저렇게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박을 순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 오전 발인을 앞둔 고인의 명복을 빈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메모 : 이가림 시인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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