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 2

[스크랩] 문태준 시 모음

향기로운 재스민 2015. 10. 1. 09:07

사진/가을남자의 평상심에서

비가 오려 할 때 /  문태준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철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극빈  / 문태준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같은 나비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시집 <가재미> 2005년 창비

 

첨부이미지

그 맘 때에는 / 문태준 제 21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작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

빈 손이다

하루를 만지작만지작 하였다  

두 눈을 살며시 또 떠보았다  

빈 손이로다  

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 보았다  

무른 나는 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  

그 맘 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

그 맘 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다

어디로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 갔을까

후두둑 후두둑 풀잎에 내려앉던 그들은

 

 

두워지는 순간/문태준 제4회 [노작문학상]수상작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 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어두워지려는 때에는 개도 있고, 멧새도 있고, 아카시아 흰 꽃도 있고, 호미도 있고, 마당에 서

  있는 나도 있고……. 그 모든 게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늑대처럼 오래 울고, 멧새는 여울처럼 울고, 아카시아 흰 꽃은 쌀밥 덩어리처럼 매달려

  있고, 호미는 밭에서 돌아와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마당에 선 나는 죽은 갈치처럼 어디에라도

  영원히 눕고 싶고……. 그 모든 게 달려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다른 개의 배에서 머무르다 태어나서 성장하다 지금은 새끼를 밴 개이고, 멧새는 좁쌀

  처럼 울다가 조약돌처럼 울다가 지금은 여울처럼 우는 멧새이고, 아카시아 흰 꽃은 여러 날

  찬밥을 푹 쪄서 흰 천에 쏟아 놓은 아카시아 흰 꽃이고……. 그 모든 게 이력이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베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이상하지, 오늘은 어머니가 이것들을 다 버무려서
  서당골에서 내려오면서 개도 멧새도 아카시아 흰 꽃도 호미도 마당에 선 나도 한 사발에 넣고

  다 버무려서, 그 모든 시간들도 한꺼번에 다 버무려서
  어머니가 옆구리에 산미나리를 쪄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이 다 어두워졌네

 

 

 

老母 / 문태준

 

 

  반쯤 남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그는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 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 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 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 준다

 

사진/바람이 숨쉬는곳에서

개미 / 문태준

 

처음에는 까만 개미가 기어가다 골똘한 생각에 멈춰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등멱을 하려 엎드린 봉산댁
젖꼭지가 가을 끝물 서리 맞은 고욤처럼 말랐다
댓돌에 보리이삭을 치며 보리타작을 하며 겉보리처럼 입이 걸던 여자
해 다 진 술판에서 한잔 걸치고 숯처럼 까매져 돌아가던 여자
담장 너머로 나를 키워온 여자
잔뜩 허리를 구부린 봉산댁이 아슬하다

 

 


뜨락 위 한 켤레 신발 / 문태준

 

 

어두워지는 뜨락 위 한 켤레 신발을 바라본다

언젠가 누이가 해종일 뒤뜰 그늘에 말리던 고사리 같다

굵은 모가지의 뜰!

다 쓴 여인네의 분첩

긴 세월 몸을 담아오느라 닳아진

한 켤레 신발이었다

아, 길이 끝난 곳에서도 적멸은 없다

 

 

산수유나무의 농사/문태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뜨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 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 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 문태준

 

 

외떨어져 살아도 좋을 일
마루에 앉아 신록에 막 비 듣는 것 보네
신록에 빗방울이 비치네
내 눈에 녹두 같은 비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나는 오글오글 떼 지어 놀다 돌아온

아이의 손톱을 깎네
모시조개가 모래를 뱉어놓은 것 같은 손톱을 깎네
감물 들듯 번져온 것을 보아도 좋을 일
햇솜 같았던 아이가 예처럼 손이 굵어지는 동안
마치 큰 징이 한 번 그러나 오래 울렸다고나 할까
내가 만질 수 없었던 것들
앞으로도 내가 만질 수 없을 것들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이 사이
이 사이를 오로지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의 혀끝에서
뭉긋이 느껴지는 슬프도록 이상한 이 맛을

 

 

 

 

시월에 /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하늘궁전 / 문태준


목련화가 하늘궁전을 지어놓았다

궁전에는 낮밤 음악이 냇물처럼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생사 없이 돌옷을 입고 평화롭다

 

목련화가 사흘째 피어 있다

봄은 다시 돌아왔지만 꽃은 더 나이도 들지 않고 피어 있다

눈썹만한 높이로 궁전이 떠 있다

이 궁전에는 수문장이 없고 누구나 오가는 데 자유롭다

 

어릴 적 돌나물을 무쳐 먹던 늦은 저녁밥 때에는

앞마당 가득 한 사발 하얀 고봉밥으로 환한 목련나무에게 가고 싶었다

목련화 하늘궁전에 가 이레쯤 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사진/엉뚱이가 도전하는 세상이야기

황도 포구 / 문태준

 


 내가 난생처음 포구를 본 것은 한 여자의 골상을 어림잡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쑥대머리 귀신처럼 그 여자 산발을 하고, 얼기설기 얽은 몸에다 노을을 한 허벅 찰랑찰랑 들이고 잇었는데,

 

 왜 그여자는 카랑카랑한 말 한마디 않았을까
 바람은 뛰어가는 소 목에 걸린 위낭에 갇혀 울고

 

 포구로 오기 위해 골이 잔뜩 팬 개펄을 지나쳐 왔다, 고 그 여자가 말한 적은 없었다
 검은 개펄에 검은 게 한마리가 오래도록 옆으로 기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늘그막에 봤어야 했을 그 검은 포구의 고수레, 고수레

 


* 안면도 부속 섬인 황도에 있는 포구

 

 

산비 소리에 / 문태준

 

 누가 푸른 똥을 누시나

 떨어져 번지는 이끼처럼 번지는, 더 번져 몽글몽글

맺히는 똥

 맺혀도 몰랑몰랑한 똥

 

 푸른 벌레가 산자두잎 뒤 잎사귀 처마로 들어가 동

글동글한 똥을 피한다

 

 목주름 펴  처마 바깥을 기웃 거리다 잗다랗고 말랑

말랑한 푸른 똥 누고 자울자울 존다

 

 잎사귀 처마를 득득 긁는 산비 소리에

 윗니 아랫니 돋아 간질간질한 산비 소리에

 

 

묵언(默言)

 

문태준

 

절마당에 모란이 화사히 피어나고 있었다

누가 저 꽃의 문을 열고 있나

 

꽃이 꽃잎을 여는 것은 묵언

 

피어나는 꽃잎에 아침 나절 내내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말하려는 순간 혀를 끊는

 

사진/gonglan님 블러그에서 사진은 어치(산까치)

한송이 꽃 곁에 온 - 문태준

 

눈이 멀어 사방이 멀어지면

귀가 대신 가

세상의 물건을 받아 오리

꽃이 피었다고

어치가 와서 우네

벌떼가 와서 우네

한 송이 꽃 곁에 온

반짝이는 비늘들

소리가 골물처럼 몰리는 곳

한 송이 꽃을 귀로 보네

내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

당신의 은밀한 농담들,

소리의 침실들, 그러나

끝이 있는 사랑의 악보들

의자를 꽃 가운데 놓고

내 몸에 수의를 입히듯

나 먼저,

오래 쓴 눈을 감네

 

 

번져라 번져라 病이여 - 문태준

 

 

1.
개망초가 피었다 공중에 뜬
꽃별, 무슨 섬광이
이토록 작고 맑고 슬픈가

바람은 일고 개망초꽃이 꽃의 영혼이 혜성이 돈다
개망초가 하얗게 피었다
잠자리가 날 때이다
너풀너풀 잠자리가 멀리 왼편에서 바른편으로 혹은
거꾸로
강이 흐르듯 누워서 누워서

 

2.
오늘 다섯 살 아이에게 수두가 지나가고, 나는 생각한다, 만발하는 것에 대하여 수두처럼 지나가는 꽃에 대하여 하늘에 푸른 액정 화면에 편편하게 날아가는 여름 잠자리에 대하여 내 생각에 홍반처럼 돋다 사그라드는 것에 대하여
그리하여 나는 지금 앓고 있는 사람이다

 

3.
그리고 나는 본다, 한 집의 굴뚝에서 너풀너풀 연기가 번져 나오는 것을 그 얼룩을
그리고 나는 안다, 이 뜨거운 환장할 대낮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한 여인을 그 얼룩을
에미가 황해도 무당이었고 남편은 함경도 어디가 고향이고 여인은 한때 소를 한때 묵뫼를 사랑했고 올여름 연기를 지독히 사랑했고 불을 때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을 그 얼룩을

연기는 아주 굼뜨고, 연기는 무학자이고, 연기는 나부이고, 연기는 풀이 무성한 묵밭이고
연기는 아궁이 앞에 퍼질러앉은 그 여인이고, 갈라진 흙벽의 정신이고, 미친 사람이고

나는 아니 보아도 안다, 벌써 스무 해 넘게 미쳐 지내온 저 여인이 어떤 표정으로 지금 앉아 있는지를
무얼 끓이느냐 무얼 삶느냐 물어도 여인은 손사래 쳐 무심히 불만 밀어넣을 것이라는 것을
몇 통의 물을 다만 끓이고 끓이고 있다는 것을
내 눈과 마주치곤 까르르 까르르 웃던 그 검은 얼굴을

 

4.

하늘의 밭에는 개망초가 잠자리가 연기가 수두처럼 지나가고 있다 더듬더듬거리며 옮겨가고 있다
번져라 번져라 病이여,
그래야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한 호흡 / 문태준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우고
피어난 꽃은 한 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 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 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사진/서정적자아님 블러그에서

빈집의 약속/문태준 -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별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매화나무 해산(解産) /문태준

 

 

늙수그레한 매화나무 한 그루

배꽃 같은 꽃 피어 나무가 환하다

늙고 고집 센 임부의 해산 같다

나무의 자궁은 늙어 쭈그렁한데

깊은 골에서 골물이 나와 꽃이 나와

꽃에서 갓난 아가 살갗 냄새가 난다

젖이 불은 매화나무가 넋을 놓고 앉아 있다

 

 

수평(水平) / 문태준


단 하나의 잠자리가 내 눈앞에 내려앉았다
염주알 같은 눈으로 나를 보면서
투명한 두 날개를 수평(水平)으로 펼쳤다
모시 같은 날개를 연잎처럼 수평으로 펼쳤다
좌우가 미동조차 없다
물 위에 뜬 머구리밥 같다
나는 생각의 고개를 돌려 좌우를 보는데
가문 날 땅벌레가 봉긋이 지어놓은 땅구멍도 보고
마당을 점점 덮어오는 잡풀의 억센 손도 더듬어보는데
내 생각이 좌우로 두리번거려 흔들리는 동안에도
잠자리는 여전히 고요한 수평이다
한 마리 잠자리가 만들어놓은 이 수평 앞에
내가 세워놓았던 수많은 좌우의 병풍들이 쓰러진다
하늘은 이렇게 무서운 수평을 길러내신다

 

 

흰자두꽃 / 문태준

 

 손아귀에 힘이 차서 그 기운을 하얀꽃으로 풀어놓은 자두나무 아래

 못을 벗어나 서늘한 못을 되돌아보는 이름모를 새의 가는 목처럼

 몸을 벗어나 관으로 들어가는 몸을 들여다보는 식은 영혼처럼

 자두나무의 하얀 자두꽃을 처량하게 바라보는 그 서글픈 나무 아래

 곧 가고 없어 머무르는 것조차 없는 이 무정한 한낮에

 나는 이 생애에서 딱 하번 굵은 손벼마디 같은 가족과

 나의 손톱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평상이 있는 국수집/ 문태준


평상이 있는 국수집에 갔다
붐비는 국수집은 삼거리 슈퍼 같다
평상에 마주 앉은 사람들
세월 넘어 온 친정 오빠를 서로 만난 것 같다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손이 손을 잡는 말
눈이 눈을 쓸어주는 말
병실에서 온 사람도 있다
식당일을 손놓고 온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평상에만 마주 앉아도
마주 앉은 사람보다 먼저 더 서럽다
세상에 이런 짧은 말이 있어서
세상에 이런 깊은 말이 있어서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큰 푸조나무 아래 우리는
모처럼 평상에 마주 앉아서

 

 

앵두나무와 붉은 벌레들 /문태준



앵두나무 가지 위로는 한쪽이 트인 달이 떴다
앵두나무 가지에 사는 붉은 벌레들은 오늘 밤에도 만났다
누구일까
늙은 앵두나무에 이렇게
다투는 허공을 담을 줄 안 이는

 


  / 문태준


배꽃이거나 석류꽃이 내려오는 길이 따로 있어

오디가 익듯 마을에 천천히 여럿 빛깔 내려오는 길이 있어

가난한 집의 밥 짓는 연기가 벌판까지 나가보기도 하는 그런 길이 분명히 있어

그 길이 이 세상 어디에 어떻게 나 있나 쓸쓸함이 생기기도 하여서

그때 걸어가본 논두렁길이나 소소한 산길에서 봄 여름 다 가고

아, 서리가 올 때쯤이면 알게 될는지

독사에 물린 것처럼 굳어진 길의 몸을

 

   사진/닥터지바고님 블러그에서
 

오, 가시 등불 / 문태준

 

삸바느질로 끼니를 어어가던 빈녀貧女 의 집인데

가시로만 이루어진 육체인데

나지막한 처마에 등불을 내 걸었다

탱자나무가 노오란 탱자를 아그대다그대 매달았다

 

오, 가시등불!

푸른 가시를 구부려 구부려서 만든

빛 덩어리

 

가슴 속은 텅 비고

마른 가시들로 새들새들하고

 

바깥을 밝히려

조랑조랑 매달린 노오란 탱자들, 빛들

 

모든 빛은 끔찍하게도 제 몸을 태운 것이니

이 눈물겨운 공양을 누가 받을 것인가

 

 

장대비 멎은 소읍 / 문태준

 

땅이 소란스러운 때를 보냈으니 누에가 갉아먹다 버린 뽕잎같다

장대비가 다녀가셨다

복사꽃처럼 소란한 놈도 걔중에는 있었고

귓불이 도톰하고 거위 소리처럼 굵은 울대를 가진 놈도 다녀가셨다

비 내린 땅은 돌꽃마냥 꼿꼿이 파인 얼굴이다

팔랑팔랑 하얀 나비 새로이 나는 것으로 장대비 멎은 줄 아는 것이지만

집을 주섬주섬 나오는 촌로들은 늙고 초췌하다

 

 

봉숭아 / 문태준


- 다현(茶顯)에게

 

봉숭아라는 이름
조그만 복숭아뼈 같지
오늘 낮에는
여섯 살 딸이
화단의 봉숭아꽃을 보고 있다
홍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쪼그려 앉은 두 발목이 붉다
발목에서부터 붉은 물이 번지고 있다
한 종이가 사각사각 젖고 있다
여섯 살은 아무래도 무른 몸
무릎이 젖고 작은 어깨가 젖는데
삐에에 울지도 않는다

 

묽다/ 문태준

 

새가 전선 위에 앉아 있다

한 마리가 외롭고 움직임이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샘물이

들판에서 하늘로 검은 샘물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논에 못물이 들어가듯 흘러들어가

차고 아두운 물이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물을

섞이면서 아주 더디게 밀고 있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환하고 어두운 것

차고 미지근한 것

그 경계는 바깥보다 안에 있어

뒤섞이고 허물어지고

밀고 밀렸다는 것은

함참 후에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도록 너무

늦지는 않아 벌써

새가 묽다

 

 

봄날 지나쳐간 산집/문 태 준

 

한채의 햇살에 끌려 나는 오후의 산집으로 갔습니다

 

뜨락에 산도라지가 말라가고 검고 마른 탱자나무에 습하고 푸른 빛이 맴도는 집

그 산집에서

내 뜰과 울타리에도 마르고 곧 젖는 것들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햇살이 촬촬 끓는 마루에서 흰 찔레꽃처럼 웃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여자는 가는 실을 실꾸리에 감아 옮기고 있었습니다

여자의 볼에 붉은 무덤이 쌓였다 허물어지는 걸 보았습니다

봄꽃이 지면 나무는 또 숲으로 가고

작은 무덤들 붉은 흙 위로는 돋아날 줄 압니다

 

 

팽나무 식구 / 문태준

 

작은 언덕에 사방으로 열린 집이 있었다

낮에 흩어졌던 새들이 큰 팽나무에 날아와 앉았다

한놈 한놈 한곳을 향해 웅크려 있다

일제히 응시하는 것들은 구슬프고 무섭다

가난한 애비를 둔 식구들처럼

무리에 볼이 튼 어린 새도 있었다

어두워지자 팽나무가 제 식구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역전 이발 / 문태준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

 

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 있는 곳

역이 없는데 역전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

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 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는 곳


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


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이 살고 있고

말라 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넣는 한 송이 꽃이 있다


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 위에 있었으나

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 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

 

사진/태봉인 김씨네 블러그에서

 

 

복숭아나무 /문태준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

 처음 맺히는 열매는 거친 풀밭에 묶인 소의 둥근 눈알을 닮아갔다

 후일에는 기구하게 폭삭 익었다

 윗집에 살던 어럼한 형도 이 나무를 참 좋아했다

 숫기 없는 나도 이 나무를 참 좋아햇다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

 마을로 내려오면 사람들 살아가는 게 별반 이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

 

 

짧은 낮잠    /  문태준

 

낮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꽃을 보내고 남은 나무가 된다

혼(魂)이 이렇게 하루에도 몇번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질 때가 있으니

오늘도 뒷걸음 뒷걸음치는 겁 많은 노루꿈을 꾸었다

꿈은, 멀어져가는 낯꿈은

친정 왔다 돌아가는 눈물 많은 누이 같다

낮잠에서 깨어나 나는 찬물로 입을 한번 헹구고

주먹을 꼭 쥐어보며 아득히 먼 넝쿨에 산다는 산꿩 우는 소리 듣는다

오후는 속이 빈 나무처럼 서 있다

 

 

한 마리 멧새 / 문태준


소복하게 내린 첫눈 위에
찍어놓은
한 마리 멧새 발자국
첫잎 같다
발자국이 흔들린 것 보니
그자리서 깔깔 웃다 가셨다
뒤란이 궁금해 그곳까지 다녀가셨다

 

가늘은 발뒤꿈치를 들어 찍은
그 발자국을 그러모아
두 귀에 부었다
맑은 수액 같다
귀에 넣고
이리저리 흔들어대니
졸졸 우신다
좁쌀 같은 소리들
귀가 시원하다
발자국을 따라가니
내 발이 아직 따뜻하다

 

멧새 한 마리
시골집 울에 내려와
가늘은 발목을 얹어 앉아
붉은 맨발로
마른 목욕을 즐기신다
간밤에 다녀간 그분 같은데
밤새 시골집을 다 돌아보고선
능청을 떨고
빈 마루를 들여다보고 계신다

 

                                                      문태준

1970년 경북 김천 태생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處暑」외 9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과 [맨발]이 있다


출처 : 시는 잔잔한 물결처럼
글쓴이 : 황토 원글보기
메모 : 가재미 시를 읽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