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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두개의 초록 &/마종기

향기로운 재스민 2015. 11. 3. 10:24

 

 

마흔두 개의 초록 (외 2편)

 마종기

 

 

 

 

초여름 오전 호남선 열차를 타고

창밖으로 마흔 두 개의 초록을 만난다.

둥근 초록, 단단한 초록, 퍼져 있는 초록 사이,

얼굴 작은 초록, 초록 아닌 것 같은 초록,

머리 헹구는 초록과 껴안는 초록이 두루 엉겨

왁자한 햇살의 장터가 축제로 이어지고

젊은 초록은 늙은 초록을 부축하며 나온다.

그리운 내 강산에서 온 힘을 모아 통정하는

햇살 아래 모든 몸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물 마시고도 다스려지지 않는 목마름까지

초록으로 색을 보인다. 흥청거리는 더위.

 

열차가 어느 역에서 잠시 머무는 사이

바깥이 궁금한 양파가 흙을 헤치고 나와

갈색 머리를 반 이상 지상에 올려놓고

다디단 초록의 색깔을 취하도록 마시고 있다.

정신 나간 양파는 제가 꽃인 줄 아는 모양이지.

이번 주일을 골라 친척이 될 수밖에 없었던

마흔두 개의 사연이 시끄러운 합창이 된다.

무겁기만 한 내 혼도 잠시 내려놓는다.

한참 부풀어 오른 땅이 눈이 부셔 옷을 벗는다.

정읍까지는 몇 정거장이나 더 남은 것일까.

 

 

 

이슬의 하루

 

 

 

이제는 알겠지,

내가 이슬을 따라온 사연.

있는 듯 다시 보면 없고

없는 줄 알고 지나치면

반짝이는 구슬이 되어 웃고 있네.

 

없는 듯 숨어서 사는

누구도 갈 수 없는 곳의

거대한 마지막 비밀.

내 젊은 날의 모습도

이슬 안에 보이고

내가 흘린 먼 길의 눈물까지

이슬이 아직 품어 안고 있네.

 

산 자에게는 실체가 확연치 않은

이슬, 해가 떠오르면

몸을 숨겨 행선지를 알리지 않는,

내 눈보다 머리보다 정확한

이슬의 육체, 그 숨결을 찾아

산 넘고 물 건너 헤매다 보니

어두운 남의 나라에 와서

나는 이렇게 허술하게 살고 있구나.

이슬의 존재를 믿기까지

탕진한 시간과 장소들이

내 주위를 서성이며 웃고 있구나.

 

이제는 알겠지, 그래도

이슬을 찾아 나선 내 사연,

구걸하며 살아온 사연.

이슬의 하루는

허덕이던 내 평생이다.

이슬이 보일 때부터 시작해

이슬이 보일 때까지 살았다.

 

 

 

이슬의 애인

 

 

 

아침마다 이슬은 나를 허물어

질투를 선물한다.

 

그런 날들이 들에 쌓여

시든 삶을 사는 마을,

모든 빛나고 아름다운 것들은

평생의 속임수가 되어

사방에서 반짝였다.

 

이른 아침의 작은 꽃은 결국

잠들어 있던 이슬이었지만

그래도 꽃향기는 몰려와

눈부신 하루를 만들고

시간의 폐허에서 나를 구해주었다.

 

간밤에는 누가 한을 남겼나,

이슬이 풀잎마다 가득하다.

그 여리고 가는 마음을 사랑하느니

야속하게 다시 배신당할지라도

나는 한 세상의 헐벗은 애인,

잊혀진 그 하루의 동행만으로도

온몸을 적시던 이슬의 춤.

 

 

 

                      —『마흔두 개의 초록』(2015)에서

 

마종기 / 1939년 일본 도쿄 출생. 1966년 도미, 미국 오하이오 주 톨레도에서 방사선과 의사로 근무. 1959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 시집『조용한 개선』『두 번째 겨울』『변경의 꽃』『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그 나라 하늘빛』『이슬의 눈』『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마흔두 개의 초록』. 산문집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아주 사적인, 긴 만남』등.

 

 

2015. 11. 03  시 대산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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