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뒷면을 보다
—바래길 연가·섬노래길
고두현
송정 솔바람해변 지나 설리 해안 구비 도는데
벌써 해가 저물었다
어두운 바다 너울거리는 물결 위로
별이 하나 떨어지고
돌이 홀로 빛나고
그 속에서 또 한 별이 떴다 지는 동안
반짝이는 삼단 머리 빗으며
네가 저녁 수평선 위로 돛배를 띄우는구나
밤의 문을 여는 건 등불만이 아니네
별에서 왔다가 별로 돌아간 사람들이
그토록 머물고 싶어 했던 이곳
처음부터 우리 귀 기울이고
함께 듣고 싶었던 그 말
한때 밤이었던 꽃의 씨앗들이
드디어 문 밖에서 열쇠를 꺼내 드는 풍경
목이 긴 호리병 속에서 수천 년 기다린 것이
지붕 위로 잠깐 솟았다 사라지던 것이
푸른 밤 별똥별 무리처럼 빛나는 것이
오, 은하의 물결에서 막 솟아오르는
너의 눈부신 뒷모습이라니!
백양나무 숲에 들어
나도 알몸이 된다
희고 미끈한 허리
서로 닿지 않을 만큼
이 절묘한 간격
밤 깊어 새벽 별 조는 사이
몰래 오줌 누는 처녀 옆에 빙 돌아선
울타리처럼 온 숲이 몸을 가리더니
그 속에서 가장 젊은 나무 하나
다른 나무에게 가만가만
몸 부비는 모습
밤마다 그렇게 돌아가며
한 그루씩 아이를 낳는다는 걸
백양나무 숲에 알몸으로 든 뒤
나는 보았다
왜 나무들이 저만큼의 간격으로
떨어져 서 있는지
햇살이 서걱서걱 그 사이를
벌려 놓는 한낮에는
어떻게 잔뿌리들이 땅 속에서
은밀하게 손 뻗는지
그 속에서 밤을 새운
뒤에야 알았다.
그 숲에 집 한 채 있네
—물건방조어부림 2
그 숲 그늘 논밭 가운데 작은 집 하나
방학 때마다 귀가하던 나의 집
중학 마치고 공부 떠나자
머리 깎고 스님 된 어머니의 암자
논둑길 겅중 뛰며 마당에 들어서다
꾸벅할까 합장할까 망설이던 절집
선잠 결 돌아눕다 어머니라 불렀다가
아니, 스님이라 불렀다가
간간이 베갯머리 몽돌밭 자갈 소리
잘브락대는 파도 소리 귀에 따숩던
그 집에 와 다시 듣는 방풍림 나무 소리
부드럽게 숲 흔드는 바람 소리 풍경 소리.
먼 바다 기억 속을 밤새워 달려와선
그리운 밥상으로 새벽잠 깨워 주던
후박나무 잎사귀 비 내리는 소리까지
오래도록 마주 앉아 함께 듣던 저 물소리.
—시집『달의 뒷면을 보다』(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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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 1963년 경남 남해 출생.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달의 뒷면을 보다』. 현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늦게 온 소포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껍질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르라」
헤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
초행
고두현
처음 아닌 길 어디 있던가
당신 만나러 가던
그날처럼,
*2015. 11.02 한국경제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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