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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별한 자가 아는 진실/ 신현림

향기로운 재스민 2015. 12. 12. 07:01

 

 

 

이별한 자가 아는 진실/ 신현림 

 

 

담배불을 끄듯 너를 꺼버릴 거야

다 마시고 난 맥주 캔처럼 나를 구겨버렸듯

너를 벗고 말 거야

그만, 너를, 잊는다고 다짐해도

북소리처럼 너는 다시 쿵쿵 울린다

오랜 상처를 회복하는 데 십년 걸렸는데

너를 뛰어넘는 건 얼마 걸릴까

그래, 너는 나의 휴일이었고

희망의 트럼펫이었다

지독한 사랑에 나를 걸었다

뭐든 걸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네 생각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너는 어디에나 있었다 해질녘 풍경과 비와 눈보라,

바라보는 곳곳마다 귀신처럼 일렁거렸다

온몸 휘감던 칡넝쿨의 사랑

그래, 널 여태 집착한 거야

사랑했다는 진실이 공허히 느껴질 때

너를 버리고 나는 다시 시작할 거야

 

 

- 시집『세기말 블루스』(창작과비평,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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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면서,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차인 거라며 훌쩍거리는 한 가련한 여인을 보았다. 세상이 절반쯤 무너진 양 푹푹 한숨을 쉰다. 하지만 이별을 했다고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불행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시대어로 '쿨한 이별' 뒤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별' 그 자체가 유쾌하지 않은 상황이 분명하다면 그 불행은 나플레옹이 말한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일 가능성이 높다. 상처와 아픔은 스스로 만든 족쇄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오래 끌어서 좋을 것은 없다. 

 

 문제는 치유이며, 다시 살아가며 사랑하는 것이겠지만 물론 쉽지 않다. 그리움으로 둘 것이냐 뭉개버릴 것이냐를 두고도 자극과 반응은 쉴새없이 뒤척인다. 오랫동안 '싱글맘'이란 수식어가 붙어다녔던 신현림 시인은 '그놈'이 그랬듯이 담뱃불을 비벼끄듯 확 꺼버리고자 결연한 의지를 불태우지만 그것 역시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북소리처럼 다시 쿵쿵 울리며, 희망의 트럼펫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잊는다는 게 아무려면 꽃이 지는 것 보다 더 쉬울 리가 있으랴.

 

 그놈이 처음 몸속에서 피어날 때가 순간이었다 해도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일 수는 없을 것이다. 몸부림이 치열해지면 그리움도 따라 짙어지리라. 그래, 어쩌면 지금 흘러나오는 이은미의 노래처럼 '그리움'을 거듭 되내이며 해바라기씨 같이 촘촘한 사랑을 추억하기도 하겠지. 그러다 '어쩌면 그대 다시 돌아와 나를 안을지도 몰라'라며 바보 미련공탱이 같은 상상을 할지도 몰라. 이별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너를 더욱 그리워하는 것이라도 되는 양. 

 

 실제로 신현림 시인의 경우는 '당신 생각하는 힘으로' 라는 시를 쓸 때의 기분만 같다면야 "배가 고프면 밥지어 먹고  쓸쓸해지면 달무리에 감싸인 달처럼 당신 팔에 휩사여 깊은 잠을 자리. 가슴의 갈대밭에 달아오르는 당신 심장 그 아늑한 노을을 느끼며 함께 있는 것에 새삼 놀라리. 가슴 속으로 산비둘기 한 마리 날아오면 밤새도록 눈이 내린 길을 보며 나는 일어나 다시 살리" 그러고서 '당신 생각하는 힘으로' 당연히 살 수도 있겠지요만 적어도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참속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냉소적이면서 자학적이고 허무의 깊은 어둠이 깔린 부정적 세계에 스스로 많이 길들여진 신현림 시인에게 이제 더이상 그놈은 집착의 대상이 아닌 것 같다. '갈 테면 가라지요' 에서 진실이 하나 더 보태어진다. '사랑했다는 진실이 공허히 느껴질 때 너를 버리고 나는 다시 시작할 거야'라고.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가 뒤늦게 '쿨한 이별'의 카드를 빼들었다. 이별의 아픔은 감기와 같다는 식의 말은 못하겠지만, 훌쩍거리는 그 가련한 여인도 상처의 치유기간을 따질 필요 없이 얼른 '온몸 휘감던 칡넝쿨'에서 빠져나왔으면 좋겠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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