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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시 모음

향기로운 재스민 2016. 4. 5. 06:42

                

나호열 시인 소개

 

시인, 문화평론가

1953년 8월 1일 충남 출생. 

경희대 대학원 졸업

1991 시와 시학으로 등단

미래시, 울림시 동인

2007년 세계한민족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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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멀다

 

 

한 그루 나무의 일생을 읽기에 나는 성급하다

저격수의 가늠쇠처럼 은밀한 나무의 눈을 찾으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창을 열어 보인 적 없는 나무

무엇을 품고 있기에 저렇게 둥근 몸을 가지고 있을까

한 때 바람을 가득 품어 풍선처럼 날아가려고 했을까

외로움에 지쳐 누군가가 뜨겁게 안아 주기를 바랐을까

한 아름 팔을 버리면 가슴에 차가운 금속성의 금이 그어지는 것 같다

베어지지 않으면 결코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문신

비석의 글씨처럼 풍화되는 법이 없다

 

참, 멀다

나무에게로 가는 길은 멀어서 아름답다

살을 찢어 잎을 내고 가지를 낼 때

꽃 피고 열매 맺을 때

묵언의 수행자처럼 말을 버릴 때

나무와 나 사이는 아득히 멀어진다

 

한여름이 되자 나무는 인간의 마을로 온다

자신의 몸에 깃든 생명을 거두어

해탈의 울음 우는 매미의 푸른 독경을

아득히 떨어지는 폭포로 내려 쏟을 때

가만가만 열뜬 내 이마를 쓸어내릴 때

나무는 그늘만큼 깊은 성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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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가고, 그도 가고 


거리의 끝에서 조등이 걸어온다 
하나, 둘, 셋 가슴을 훤하게 비워두고 
어둠한 밤길 태우는 종이 냄새 
살아 있는 사람만이 울 수 있다 
울면서 후르륵 라면을 먹고 
울면서 담배를 태울 수 있다 
죽음은 죽은 이의 것 
왁자지껄한 이 세상의 안부가 
자욱한 향불에 가려 가물거린다 
어색한 조문객들이 서투르게 
서로의 그늘진 얼굴을 숨긴채 
무관심하게 떨어지는 나뭇잎을 밟는다 
울지 않는 나뭇잎을, 
더 세계 밟으면서 
저 언덕밑의 조등들, 
하늘에 매달린 조등들을 
점자로 읽어내고 있다 
문장이 되지 않는 몇 줄의 바람을, 
남루로 흔들리는 한 생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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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전해준 새 소리 


죽지 않을 만큼만 잠을 잔다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죽지 않을 만큼만 꿈을 꾼다 
죽지 않을 만큼만 말을 하고 
죽지 않을 만큼만 걸어간다 
그래야 될 것 같아서 
누군가 외로울 때 
웃는 것조차 죄가 되는 것 같아서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아, 그러나, 
그러나 
모든 경계를 허물지 않고 
죽지 않을 만큼만 사랑할 수는 없다 
누구나 말하지 않는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나는 그 끝마저도 
뛰어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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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를 사랑한 이유 


꽃이었다고 여겨왔던 것이 잘못이었다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이 고통이었다 
슬픔이 깊으면 눈물이 된다 
가시가 된다 
눈물을 태워본 적이 있는가 
한철 불꽃으로 타오르는 장미 
불꽃 심연 
겹겹이 쌓인 꽃잎을 떼어내듯이 
세월을 버리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 
처연히 옷을 벗는 그 앞에서 눈을 감는다 
마음도, 몸도 다 타버리고 난 후 
하늘을 향해 공손이 모은 두 손 
나는 장미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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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 그 깊은 우울


오늘도 사막을 건넜다. 
신기루처럼 보였다 사라지는 사람들 
천국이고 지옥인 사람들 사이에 
없는 길 마음으로 끌어가며 
먼 서울에는 황사가 내렸다고 한다. 
뼈와 눈물과 꽃과 불들이 한꺼번에 화해하며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눈꺼풀 위로 
부끄러운 흔적을 남겼다 한다. 
몇 날 며칠을 그렇게 바람이 불고 
나의 형체를 미세한 모래로 남기는 일 
설산에 누가 있어 노을은 저리도 유적하게 깔리는가 
세상 밖의 일인줄 알았더니 
아직도 내게는 태워버려야 할 기쁨도 있어 
실낱같은 미소를 舍利로 남기며 
사막을 건너 가는 나는 행복하다 
사막을 집으로 여기며 돌아오는 사람들 보다는……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 시와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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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가르쳐 준 그리움


메일이 없습니다 
받은 편지함에는 편지가 없다 
받을 편지는 이미 도착했는데 
받은 편지함에는 편지가 없다 
받을 편지는 이미 읽었는데 
몽글몽글 하얀 수국 꽃잎 같은 글씨 보이지 않고 
받은 편지함에는 편지가 없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동구 밖으로 
길은 가다가 되돌아오고 
외진 산 기슭 성황당 돌 무더기처럼 
켜켜이 쌓여가는 시그널 
메일이 없습니다가 
매일이 없습니다로 보이고 
내일이 없습니다로 흐릿해지더니 
제멋대로 하루는 로그 아웃된다 
메일이 없다는 것은 
매일이 없다는 것이고 
내일이 없다는 것이라고 
나를 로그 인 시키려면 
그대가 가르쳐 준 
비밀번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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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말걸기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꽃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은 
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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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속에는 나무가 살고 있다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문득 내 앞을 가로막아 서는 
저 거대한 침묵이 
마지막으로 내가 마주 할 외로움이라면 
두 팔로도 껴안을 수 없고 
고개 들어도 아득한 그런 외로움이라면 
차라리 사랑하기로 했다. 

네 앞에 서면 말을 배운 것이 부끄러워진다. 
천천히 늘어뜨리는 향내나는 치맛자락처럼 
그림자 하가 마당을 덮고 
담장 무너뜨리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높은 산을 넘어간다. 

너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너는 소리내지 않고 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너는 우주의 중심이 어딘지 내게 알려 주었다. 

이렇게 멀리 서서야 온전히 
너를 바라보며 
사랑할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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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화로 靑桐火爐 


이 세상 가장 낮은 땅, 강 하구 뻘밭에 금가고 깨진 청동화로가 가슴에 강과 바다를 가득 품고 있었다. 

스스로 어떻게 뜨거워질 수 있었겠는가 
그대가 말없이 태우던 잿빛 문장이 
한번 더 불길로 일어나 
그 불길을 누르고 또 누르던 
그대의 눈물이 없었다면 
뜨겁게 달구어질수록 조금씩 뒤로 물러앉아 
뜨개질을 하거나 
아주 슬픈 소설을 읽어 가는 눈빛이 없었다면 
겨울의 긴 바람, 유리처럼 부서져 내리는 
별들이 가슴에 가득 차면 
영혼의 깊은 샘물을 길어올리듯이 
조심스레 가슴을 
말 못하고 태워 버린 재들을 비워주던 
그 손길이 없었다면 
그러나 싸늘히 식어가는 일은 오직 나만의 일이었기에 
조금씩 금가고 깨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설산에서 흘러내리는 강물로 뛰어들어가 
스스로 식어가기를 기도했는지 모른다 

엎드린 채로 
지상에서 가장 낮은 땅 끝과 
가장 깊은 바다가 시작되는 뻘밭에 누워 
지금 청동화로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시집 ;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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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언제부터인가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어 
그 자리에 놓여진 것들 탐내지 않고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고 
부드럽게 감싸안을 줄 아는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어 
처음에는 더듬거리고 막막해 하다가 
한 걸음씩 고개 숙여 걸어가다 보면 
엷은 슬픔의 축축한 옷 안개의 속마음을 알게 되지 
껴안을수록 나의 두 손은 허허로운 가슴께로 모두어지고 
헤쳐나가면 나갈수록 무겁게 다가서는 생을 사랑하게 되었어 
한걸음 벗어난 아득한 벼랑 너머에도 
하늘과 땅 밑에도 길이 있음을 눈감고 알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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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하루·1 


한낮은 고단하였다 
가도가도 너른 풀밭은 보이지 않았고 
멍에는 무거웠다 
끝내 풀 수 없었던 밧줄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얽혀져 있었다 
쇠방울을 울리며 
외양간으로 돌아오는 발굽 아래로 
저녁은 부끄러웠다 
진통제가 풀리는 
밤이 깊어질수록 
피로와 뒤섞인 꿈은 
더욱 병들어갔다 
나는 무엇인가 
무엇인가 알기 위하여 
더 많은 꿈들이 필요하였고 
더 많은 현실이 차용되었다 
마지막에 꾼 꿈은 
푸른 하늘 비스듬히 내려앉은 언덕에 
기대앉은 나의 모습 
누군가 액자에 그 풍경을 담아 갔는데 
아직도 그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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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물으신다면

 

 

그날 
어땠느냐고 
왜 그 말을 하게 되었느냐고 
처음 
말을 배우고 
글을 배울 때 다가온 
세상처럼 
갑자기 
성경을 읽고 싶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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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1

 

 

그대 생각에 가을이 깊었습니다 
숨기지 못하고 물들어 가는 
저 나뭇잎같이 
가만히 
그대 마음 가는 길에 
야윈 달이 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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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2

 

 

구월 
바닷가에 써 놓은 나의 이름이 
파도에 쓸려 지워지는 동안 

구월 
아무도 모르게 
산에서도 낙엽이 진다 

잊혀진 얼굴 
잊혀진 얼굴 
한아름 터지게 가슴에 안고 

구월 
밀물처럼 와서 
창 하나에 맑게 닦아 놓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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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숲의 은유 


살아남기 위하여 
단 하나 남은 
잎마저 떨구어 내는 
나무들이 무섭다 
저 혼신의 몸짓을 감싸는 차디찬 허공 
슬픔을 잊기 위해서 
더 큰 슬픔을 안아 들이는 
눈물 없이는 
봄을 기다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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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 / 나호열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운 
이승과 저승의 어디쯤에 
나는 서 있는 것이다 
소요의 산 어디쯤에 
뉘엿뉘엿 자리잡은 비탈진 나무들 
햇살이 꽂히는 곳이면 
어디든 세상의 중심인 것을 
나는 성급히 직선을 꿈꾸었다 
아니면 너무 멀리 에둘러 돌아 왔다 
이빨 빠진 늙은 꽃들 웃는다 
중심을 향하여 뿌리를 감추고 
알록달록 나들이 왔다고 
터진 발을 감춘다 


현대시 / 20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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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前生  


입다물고 있어 
한때는 무엇이었을 쓰레기들 
비닐봉지에 몸을 섞는다 
3인용 쇼파 하나 비닐봉지 옆에 
내버려져 있다 
한때는 나도 등나무였던 시절이 있었다 
꽃도 피우고 잎도 돋고 
바로 서지는 못해도 뜨겁게 사랑할 줄 알았다 
너도 버려졌구나 
화적떼처럼 달려드는 바람을 어쩌지 못하고 
은행잎들 무수히 쇼파에 내려앉는다 
아무도 그들이 떠난 곳을 묻지 않는다 
모든 쓰레기는 전생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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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먼 길을 걸어온 사람에게

다시 먼 길을 돌아가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그의 신발에 입맞춤 하겠네

힘든 오르막길이었으니

가는 길은 쉬엄쉬엄 내리막길이라고

손 흔들어 주겠네

 

지키지 못할 것이기에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기에

약속은 사전에 있는 것이네

 

그대가 왔던 길을 내가 갈 수는 없으니

돌아가는 것도 그대의 수고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서운할까

그래도 보일락 말락 그만큼 거리에서

그대에게 할 말이 있네

들릴락 말락

꽃이 피었네

 

 

눈물이 시킨 일 / 시와시학,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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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이 보고 싶다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들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보았다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떠들었다

듣지 않는 귀

보지 않는 눈

말하지 않는 혀

그래도 봄바람은 분다

그래도 제비꽃은 돋아 오른다

뜯어내도 송두리째

뿌리까지 들어내도

가슴에는 제비꽃이 한창이다

 

 

당신에게 말걸기/ 예총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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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여리고 작은 새일수록 위험하다 
날개 돋힌 그날부터 하늘은 
경외이며 공포 
그들의 비상은 
지상에 내려앉기 위한 불치의 고통 
부러질 듯 
바람에 휘는 나뭇가지 위에서 
함께 흔들리는 하루 
어린이 놀이터 그네에 흔들리며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작은 새들을 본다 
그들은 쉬기 위하여 한결같이 
가는 나뭇가지를 잔뜩 움켜쥐고 있다 


당신에게 말 걸기/ 예총출판 시선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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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운
이승과 저승의 어디쯤에
나는 서 있는 것이다
소요의 산 어디쯤에
뉘엿뉘엿 자리잡은 비탈진 나무들
햇살이 꽂히는 곳이면 
어디든 세상의 중심인 것을
나는 성급히 직선을 꿈꾸었다
아니면 너무 멀리 에둘러 돌아 왔다
이빨 빠진 늙은 꽃들 웃는다
중심을 향하여 뿌리를 감추고
알록달록 나들이 왔다고
터진 발을 감춘다


 

 

현대시 / 20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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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사랑꽃들

 

 

 잎사귀는 네잎 클로버, 꽃은 패랭이꽃을 닮았다. 오상고절傲霜

孤節의 국화도 아니고 매운 바람 맞서는 매화는 더더욱 아니고,

뒤에 숨긴 꽃말은 아예 없다. 사랑꽃 이라니, 곰곰하고 궁금하다

 물이 있으면, 햇살이 있으면 그저 얼굴 내밀었다가 저녁이면

고개 수그리는, 저게 무슨 사랑 꽃이야!

 푼수 같은, 질 줄 모르고 그저 피기만 하는 몸짓들을 바라보

면, 향기 없는 것이... 밥 먹고, 잠자고 일어나서 일하는 것들이

죄다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 미련한 저 짓이 수고스러워 보여

이제는 잎 지고 꽃도 떨어지라고 겨우 내내 찬 바람 부는 베란

다에 내다 두었다.

 

 아, 천지에 가득한 저 꽃,

 세상 어둡고 매서워

 이제는 영영 사라져버린 줄 알았는데,

 동토를 비집고 나오는 저 푸른 손

 발그스름 펼쳐 보이는 저 얼굴

 세상의 즐거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신에게 말걸기/ 예총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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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을 찾아서 


 

표지판 일러주는 대로 걸었다 
길 따라 마음은 가지 않았다 
높은 곳 
더 높은 곳으로 향하는 
마음 속에서 
조용히 자세를 세우는 
나무들 
죽은 듯 살아라 
살아도 죽은 듯 하라 
숨죽여 뿌리는 깊어지고 
둥글어지고 
머리와 멀어지는 
아득한 깨우침 
낮게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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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벽화. 1 


내 마음의 벽화는 
말하자면 
거실 한 쪽 벽에 
못 박혀 있는 
동양화 액자와도 같은 것이다 
있어도 없는 듯 하다가 
가끔 눈길이 가면 
푸른 하늘 
마을로 가는 오솔길 
밭가는 농부와 소 
텅 빈 여백과 
먹빛만으로 
한 걸음씩 다가오듯이 
내가 어디 있나 
길 잃고 두리번거릴 때 
여기 있어 하면서 
내 마음에 못 박혀 
당신이 손짓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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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벽화 . 2 


 

글을 모르는 사람이 그림을 그린다 

그림이 말인 줄 아는 사람이 그림을 그린다 

말이 바람인 줄 아는 사람이 그림을 그린다 

나는 글을 안다, 그림이 말이 아닌 줄 나는 안다 

말이 바람이 아닌 줄 나는 안다 

그러므로 그 벽화는 내가 그린 것이 아니다 

내게 말을 걸고 

쪽지를 건네주고 

바람에 펄럭이는 그 벽화는 

어두워져야 보이고 

비바람 몰아쳐야 보이고 

내가 혼자 먼 길 갈 때 보인다 

그러므로 그 벽화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말해 줄 수 없다 

그 벽화가 기쁘다 

그 벽화가 슬프다 

그 벽화가 까르르 웃고 

그 벽화가 젖은 울음을 운다 

벽화의 주인은 

벽이다 

나를 감싸주는 

그 벽!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없다 / 포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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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벽화 . 3 


 

얼만큼의 깊이로 
마음에 못을 박아야할 지 모른다 
그림 하나를 걸어두려고 
못질은 계속되지만 
완강하게 밀쳐버리는 그 무엇이 있어 
튕겨나오는 작은 불꽃들 
마음 아프게 못질을 하지 않으면 
걸 수 없는 그림이 있어 
미소짓는 그 눈빛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나는, 알아 나는 알아 
멀찌감치 빗겨 서서 바라보는 그림이 있어 
무엇이 그를 미소짓게 하였는가 
무엇이 그를 그윽한 눈빛으로 가득 차게 하였는가 

그림을 걸고 싶다 
바다를 향하여 
너른 초원을 향하여 
그러기 위해서 나의 마음은 
전생이 나무였을 벽이 되어야 한다.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다 / 포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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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벽화. 4



 

상하다 
손에 온기가 남아 있다 
누군가가 잡아주었던 향기 
이상하다 
모래 부서져내리는 가슴에 
밤 길잡이 별이 달려 있다 
이상하다 
오래 전에 떠나왔던 나의 방에 
누군가가 다녀갔다 
선지자들은 왜 벽에 대고 기도를 했을까 
잡을 수 없는 이데아는 등 뒤의 햇살 
저 너머에 있고 
벽에 너울대는 제 그림자를 그토록 지우려 애썼을까 
나는 벽에다 인사를 한다 
안녕, 나는 오랫동안 슬픔에 대해 이야기 했다 
안녕, 만난 적이 없는데 왜 수없이 작별해야 하는가 
안녕, 잡을 수 없는 벽이 손을 내민다 
안녕, 나는 벽에 등을 기댄다 
벽 속에서 길이 열리고 다시 눈이 내린다 
벽 속에 문이 있다 
안녕, 나는 벽 앞에 무릎을 꿇는다 
가장 낮은 자세로 두 손을 올린다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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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봄밤 


높은 나뭇가지 위의 가계가 위태롭다 
고개 수그려야 보이는 지상의 먹이 
수직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보다 
하강은 괴롭다 
바람은 늘 나를 먼 곳으로 떨구어 놓기에 
이불을 끌어당기니 
이불이 내 몸보다 더 춥다 


계간 ; 시와시학 / 2005,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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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山 


 

그대는 내 몸 속에 산다. 낭떠러지, 하염없는 늪 되돌아 

올 길 아예 버리고 내 몸 흔들릴 때마다 깊은 소쩍새 울 

음소리만 들린다. 얼마나 깊은 산인지 차마 그 이름 부르 

지 못하고 포르릉 작은 날짐승이 되어 보아도 이내 헤매 

이는 마음만 정처가 없어 발자국인지 날갯짓인지 모를 

은행잎 갈잎만 발밑에 쌓인다. 

우두커니 그 어디에서 바라보아야 하는가 肉脫하지 않 

으면 보이지 않을 산, 그대. 누가 아름다움을 내게서 보고 

간다면 그것은 그대를 닮아가고 싶은 내 마음뿐이리라.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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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고, 꽃 지고 


꽃이란 꽃을 다 좋아할 수는 없지만 
꽃이란 꽃이 죄다 아름다운 것은 
피거나 지거나 그 사이가 
생략되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을 하나의 얼굴로도 충분히 
물의 깊이로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꽃 같은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물 흐르듯 같이 흘러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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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꽃, 꽃 안개 


한아름의 꽃을 안개라 하고 
안개 그 앞에서는 
꽃이라 우겨대는 
이쁜 사람들 틈에 
꽃을 보아도 
꽃으로 보이지 않고 
불현 듯 내 앞에 서는 
안개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갑자기 시력이 떨어진 
그 틈에 
눈물이 떨어진다 
꽃이 되기 위하여 
안개가 되기 위하여 
소금기 머금은 눈물이 가득한 
빈 화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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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발을 든 사내 

 

시든 꽃을 든 사내가 
네거리 고장난 신호등 앞에 서 있다 
꽃이 저렇게 말라가며 검게 변하는 것은 
햇살이 너무 강렬하거나 
그가 너무 오래 걸어왔기 때문이다 
저 보라색 꽃다발은 지금 
사내의 팔에 담겨 있지만 
그는 들판을 헤매며 자신의 치장을 위해 
꽃을 꺾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달려가야 할 
달려가서 얼싸안아야 할 
소중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는 매일 시든 꽃을 꺾어 
네거리 신호등 앞에 선다 
그의 팽하고 깊숙한 눈은 
영혼의 가파른 계단 밑으로 열려 있다 
그의 눈에서 새어나오는 붉은 신호등 
나는 본다 그가 걸어왔던 
다시 걸어가야 할 방은 
그을음으로 가득한 등잔 속이다 
눈물을 태우면 천사의 옷자락이 타들어 가는 
향기가 새어나온다 
나는 본다 그가 숯 검덩이가 되어가면서 
등잔 심지를 태우는 것은 
그림자 가득한 자신의 얼굴을 
누군가에게 보여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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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으로 달려가 


달리기를 해 보면 안다 

속력을 낼수록 정면으로 다가서서 

더욱 거세지는 힘 

그렇게 바람은 소멸을 향하여 

줄기차게 뛰어간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나의 배후는 바람으로 

바람으로 그대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달리기를 해 보면 안다 

소멸을 향하여 달려가는 바람과 멀어지면서 

나 또한 잠시라도 멈추어 서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싶지만 

앞으로 떠밀어내는 힘 때문에 

더 멀리 달려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풀썩 무릎 꺾고 주저앉기 위하여 

거친 숨 몰아쉬며 그대 이름 부르기 위하여 

세상에는 그렇게 어딘가를 떠나온 

도착해야할 집들을 잃은 

꽃들이, 나무들이 

바람으로 

바램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 포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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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켜다 


 

밝고 맑은 날에는 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둡고 길 잃어 힘들어질 때 

저는 비로소 당신 곁으로 달려가 

당신의 발 밑에 엎드리는 작은 불빛입니다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저는 예비합니다 

밝고 맑은 날에도 저는 영혼의 심지를 올려 

어둡고 비바람 치는 날이 오지 않기를 

사랑의 촛대 위에 눈물을 올립니다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 포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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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다는 것은 


 

그리웁다는 것은 그 무엇이 멀리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행하면서도 등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등 돌린 채로 등 돌린 채로 

아무리 불러봐도 뒤돌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웁다는 것은 아직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대가 있어 아름다운 세상 곁에 

나도 가만히 서 있어 보고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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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서



 

내가 난다. 거기 누구? 잠시 멀어졌다가 이내 돌 

아오는 풀 냄새. 무엇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자 

리에 머물겠다고 뿌리내리려는 생이 꿈틀거리며 울고 있 

다는 것이다. 더듬거리는 손에 정적이 잡혔다가 저만치 

안개로 달아나 버리고 훅, 흐느낌처럼 물비린내가 난다. 

살아, 꿈틀거리는 살냄새. 그물을 뚫고 나오는 비릿한 달 

빛, 멀리 돌아와 가 닿은 포근한 가슴에 등으로 달아 두 

고 벙그는 꽃잎의 마음을 읽는다. 짧은 생을 마감하는 고 

추잠자리의 꿈을 지웠다가 다시 허문다.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 시와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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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 그 깊은 우울 



 

오늘도 사막을 건넜다. 

신기루처럼 보였다 사라지는 사람들 

천국이고 지옥인 사람들 사이에 

없는 길 마음으로 끌어가며 

먼 서울에는 황사가 내렸다고 한다. 

뼈와 눈물과 꽃과 불들이 한꺼번에 화해하며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눈꺼풀 위로 

부끄러운 흔적을 남겼다 한다. 

몇 날 며칠을 그렇게 바람이 불고 

나의 형체를 미세한 모래로 남기는 일 

설산에 누가 있어 노을은 저리도 유적하게 깔리는가 

세상 밖의 일인줄 알았더니 

아직도 내게는 태워버려야 할 기쁨도 있어 

실낱같은 미소를 舍利로 남기며 

사막을 건너가는 나는 행복하다 

사막을 집으로 여기며 돌아오는 사람들 보다는......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 시와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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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암 가는 길 



 

뚜두둑 목 부러지는 동백도 아니 보고 

그리운 상사화 아직도 피지 않아 

발길 또 서운해지려 합니다 



마음눈 맑지 않으면 바위 속으로 무너져 버리는 

마애불 찾지 못하여 못내 

서운해지려 합니다 



동백도, 상사화도 마애불도 너의 마음 속 

비결처럼 숨어있다고 

그립고 사무치는 일 조금은 서운히 남겨두는 것이 

사는 기쁨이라고 

저만큼 올라오는 산객이 

모른 척 지나가며 일러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 시와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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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랑은 

꽃이 아니다 

꽃 지고 난 후의 그 무엇 

사랑은 열매가 아니다 

열매 맺히고 난 후의 그 무엇 



그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이 지상에 처음으로 피어나는 꽃 

이 지상에 마지막으로 맺히는 열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 시와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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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잎의 힘 


 

동짓달 
불씨 없는 화로에 
어쩌자고 
내려 쌓이는 것이냐 
하늘을 우러르게 하던 
시퍼런 지폐의 위용 
다 어디다 버리고 
가볍게 한 해를 
마감하는 것이냐 
겨울 밤 찬 공기를 
북북 그어대며 
이 가슴으로 낙하하는 
찢어버릴 수도 
태워버릴 수도 없는 
가랑잎이여 
세월을 묵비하는 탯줄 
나는 안다 
휴지조각보다 못한 네가 
나무 한 그루를 
높이 키 세웠음을 나는 안다 
햇빛과 천둥과 세찬 비바람이 
네가 키워낸 어느 나무의 
힘이었음을 
활짝 편 
네 거칠어진 손을 보고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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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었다 


 

나는 물었다 

나무에게, 구름에게 꽃에게 

흐르는 길이며 강물에게 

그들은 말하지 않고 

조용히 몸짓으로 보여주었다 

일인극의 무대 

굴뚝이 연기를 높이 피워 올렸다 

절해고도 표류자의 독백처럼 

표정이 없는 희망이 되는 

사전에 없는 어휘가 되는 

물음들 

아직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아 

나는 본다 

나무의, 구름의, 꽃의, 흐르는 길과 강물의 

커져가는 귀를 본다 

귀는 물음표를 닮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 시와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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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햇살



 

아침에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눈뜨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해맑은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아무도 오지 않은 
아무도 가지 않은 
새벽길을 걸어가며 
꽃송이로 떨어지는 
햇살을 가슴에 담는 일이 행복이다 

가슴에 담긴 것들 모두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마음 아팠던 
사랑을 기억하는 일이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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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새의 노래 





그때가 그립다. 

튼튼한 어깨 위에 그대를 싣고 

가자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며 

사랑은 아름다운 노역이라고 

믿었던 그때가, 



생각은 무겁고 

갈 곳이 막막한 노인처럼 

캄캄함 과거에 

뒷발질을 해 본다 



어디에도 牛馬가 갈 길은 없다 


칼과 집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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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녹고 다시 얼어붙은 빙판길을 

오늘은 내가 간다 

네가 넘어지지 않으려고 잡았던 

나무가지를 오늘은 내가 잡고 

네가 뒤우뚱거리며 엉덩방아를 찧었던 그 자리 

나도 덩달아 미끄러지며 

네가 힘들어 하며 혼자 걸어갔던 눈길을 

오늘은 내가 혼자 걸어간다 

언제 우리가 손 한 번 따스히 잡아 보았던가 



눈 몇 송이 눈물로 떨어지고 

눈 몇 송이 꽃으로 피어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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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번 국도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알지 

이 길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 길인지 

물어보지 않지 

이정표를 놓치고 길 잘못들어 헤매일때 

바람보다 슬픈노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부딪히고 깨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노래 

머무를 수 없는 바람의 길 

이제는 눈감고도 훤히 끝이 보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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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그리움으로 피었다 지는 꽃 
살아온 흔적 중에 빛나는 일만 적으라 하네 
높은 지위 
남에게 자랑하여 고개 숙일만한 일들을 
요약해서 적는 것이 약력이라네 
나이 들면서 자꾸 뒷 쪽을 바라보는 것은 
덧셈보다 뺄셈에 능숙해지는 
바람을 닮아가기 때문이라네 
바람이라고 적을 수는 없네 
떠돌이였다고 말할 수는 없네 
태어난 그 날부터 지금까지 
먼지처럼 쌓였다 사라져버린 
그 수많은 날들을 
나는 축약할 수가 없다 
기억나지는 않으나 
밥 먹고 잠들었던 
잠들었다 부시시 깨어나던 동물의 날들을 
나는 버릴 수가 없다 

나는 약력을 쓰네 
꿈이 꿈인 줄 모르고 
꿈속을 헤매다가 
꿈속에서 죽어서도 
죽은 것인지 조차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 마디로 줄여서 약력을 쓰네 

 

 

당신에게 말걸기 / 20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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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으로 말하다

 

                     

떠나보지 않은 사람에게

기다려 보지 않은 사람에게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잔뜩 움켜쥐었다가

제 풀에 놓아 버린 기억이 없는 사람에게

독약 같은 그리움은 찾아오지 않는다

 

달빛을 담아 봉한 항아리를

가슴에 묻어 놓고

평생 말문을 닫은 사람

눈빛으로 보고

눈빛으로 듣는다

 

그리움은 가슴 속에서 피어나는 꽃

 

그저 멀기만 하다

멀어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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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꽃 무늬 화병花甁

 

 한 겨울

낟알 하나 보이지 않는

들판 한 가운데

외다리로 서서 잠든 두루미처럼

하얗고 목이 긴

화병이 내게 있네

영혼이 맑으면 이 생에서

저 생까지 환히 들여다보이나

온갖 꽃들 들여다 놓아도

화병만큼 빛나지 않네

빛의 향기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구문 반의 발자국 소리

바라보다 바라보다 눈을 감네

헛된 눈길에 금이 갈까 봐

잠에서 깨어 하늘로 멀리 날아갈까 봐

저만큼 있네

옛사랑도 그러했었네

 

 

눈물이 시킨 일 / 시와시학,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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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시킨 일

 

한 구절씩 읽어 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만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눈물이 시킨 일 / 시와시학,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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