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임영조 시모음

향기로운 재스민 2017. 11. 4. 15:04


권태를 위하여

살다 보면 문득
나를 잊고 싶을 때가 있다
급행열차 선반에 얹어놓고
꾸벅꾸벅 졸며 가다가
그만 깜박 잊고 내리듯
나를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어떤 날은 또
나를 살살 유인해
어느 으슥한 술집으로 끌고가
진탕 술이나 먹이면서
주정하듯 함부로 지끌이는 불평과
입 밖에 낸 적 없던 저주까지도
곰곰 새겨듣고 싶을 때가 있다

말이 말을 구속 하거나
재털이 같은 세상에
꽃씨 부리듯 시를 쓰고 있음을
자각할 때는.


달맞이꽃


어스럼 저녁 퇴근길
피곤처럼 땅거미가 내리고
그때 밤의 요정이 문득
내 옆으로 다가와 추근거렸다
___아저씨, 저랑 놀다 가요,네?
스물 안팎 치고는
자태가 너무 야한 꽃
그녀의 눈먼 욕정 앞에서
차라리 나는 성난 짐승이고 싶었다
____아니,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그만 마침점 찍고 돌아서자
멋쩍은 듯 노랗게 웃던
오면서도 못내 눈에 밟히던
비밀이 많은 여인
그 무슨 말 못할 邪戀으로
밤애만 피었다가 아침에 지는
오, 기구한 娘子
달맞이꽃이여.


치킨센터


불빛 흐린 취조실
몇 마리 절망이
굵은 철사줄에 꿰인 체
빙글빙글 구워지고 있었다

벌거벗긴 알몸으로
가혹하게 당하는 전기고문
이미 마비된 사지가 오그라들고
전신에 누런 진땀이 난다

____어서 솔직하게 다 불어!
누가 사주했지
____바른 대로 안대면 아예
새까만 숯덩이로 만들 테니까!

한때는 날개를 달고
눈부신 비상을 꿈꾸던 자들
남 다 자는 새벽에
무어라고 외치다 잡혀 왔을까?

동이 튼다 꼬끼오
일어나라 꼬끼오
홰치며 우는 것도 죄가 됐을까?

이 비정한 도시
사람들은 저마다 잠속에 빠져
닭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저 밀폐된 방에서
죽어가는 비명도 듣지 못한다

치킨센터 유리벽 넘어
노릇노릇 구워지는 통닭을 보며
왕성한 식욕이나 느낄뿐
입맛을 다시며 찢어 먹을뿐
날마다 추락한 자의 아픔은 모른다.


自畵像

어느덧 사십 년 지나
골동품 다 되가는 자물통 하나
묵비권을 행사하듯 늘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하지만
뜻맞는 상대와 내통하면
언제든 찰칵!
꼭꼭 잠가둔 마음을 푼다
천성이 너무 솔직하고 순진해
안 보여도 좋을 속까지
모조리 내보이는 자물통 하나
가슴속에 싸늘한 뇌관을 품고
保守냐? 改革이냐?
목하 고민중인 자물통 하나
남의 집 문고리에 매달려
알게 모르게 녹슬고 있다.



억새꽃

가을바람 소슬한 날
산언덕에 오르니 문득
하얀 웃음소리 들렸다

어느듯 한청춘 가고
이제는 하릴없어 심심한 노인들이
야위고 시린 등을 서로 기댄 채
저마다 서걱서걱 살아온 생애
색 바랜 來歷을 자술하고 있었다

____자식도 품안에 자식이지
____늙마에 남는건 빈손뿐이야
____末年이 깨끗하려면
두 손 훌훌 털고 가벼워야 돼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순은빛 백발만 머리에 이고
그래도 마음만은 홀가분한지
하하하하하하..............
온몸으로 하얗게 웃고 있었다




넥타이

이른 아침 거울을 보며
스스로 목을 맨 올가미가
온종일 나를 끌고 다닌다
서투른 근엄을 위장해 주고
더러는 나를 비굴하게 만들고
갖가지 자유를 결박하는 끈

도데체 누굴까?
이 견고한 줄로
내 목을 거뜬히 옭아 쥔 者는...

답답해라,
어머니의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온 이후
나는 아무런 줄도 잡지 못하고
불안한 도시 안개 속을 헤매는 羊

제발 정신 좀 차려야지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하면서
뒤틀린 넥타이를 고쳐 매지만
나는 다시 고분고분 길들여진다
낯선 시간 속으로
바쁘게 끌려가는 서러운 노예처럼.


임영조 시인의 <갈대는 배후가 없다>>중에서



綠茶를 끓이며


삼복 염천 열탕에
비쩍 마른 지체들이
훌렁 벗고 들어앉아 속끓이더니
마침내 스멀스멀 온몸을 푼다

바로 이땔까 싶게
淨한 마음 기울여
녹차를 따르면 금새
청화잔에 두둥실 만월이 뜬다

먼 산이 우러니듯
비릿한 웃음이 고여
잔 가득 달무리가 번진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런 날은 부디
가슴속 빗장을 풀고 오라
그늘을 지우듯 루즈도 지우고
뜨겁고 진한 그리움이 아니면
목마른 눈빛 하나로 오라.


미로찾기


出口를 찾는다
한가닥 희망과 만나기 위해
오늘도 낯선 길을 헤맨다

이 길일까?
저 길일까?
가도 가도 출구는 안 보이고
어느듯 하루해가 저문다

혹시나 이 길일까 싶어서
미궁 속을 조심조심 더듬어가면
눈앞을 가로막는 아찔한 절벽
그 까마득한 정상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먼저 와
흰 수염을 만지며 바둑을 두고 있다

___인생의 지름길은 없나요?
___그걸 알면 누구나 詩를 쓰게!


문득 돌아보면 아뿔사
애초부터 잘못 든 길이잖아?
그래도 후회는 마라
바로 가든 모로 가든
갈 데까지 가보면 안다

저물녘에 당도하는 오솔길
어차피 혼자 가야 할
그 쓸쓸한 길 하나 찾기 위해
우리는 한평생을 그토록
허둥지둥 바쁘게 달려왔음을.



자동판매기


동전을 넣고
버튼만 누르면 즉시
척척 알아서 작동하는 수전노

돈만 주면 언제든
제 몸속 피까지 파는 사내
그러나 받은만큼 내줄뿐
덤도 없고 에누리도 모른다

저 낯두꺼운 배금주의자
그가 폐수를 쏟듯 매양
우리들의 빈 컵을 채워준 것은
한 잔의 달콤한 선심
어딘지 좀 꺼림칙한 어둠이었다

알고 보면 네나 내나
자존심이 금가고 혼나간 기계
도시의 한켠에 방치된 채
아무나 눌러도 되는
그래서 얼굴이 닳아 윤나는
한 대의 뻔뻔스런 자동판매기

누굴까?
내 입에 푼돈을 넣고
날마다 제멋대로 조작한 자는
내게서 무엇을 뽑아갔을까?
양심일까? 피일까?





그게 아닌데
정말 그게 아닌데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때 안다는데
철석같이 믿어온 내가 어리석었지
햇빛 부신 지난 봄
화단가에 돋아난 새싹을 보며
틀림없이 국화싹일 거라고
가을에는 꽃 몇 송이 피워줄
국화싹일 거라고 믿어왔더니
키만 멀쑥 자라서
배신의 등을 보인 쑥이라니
예끼,
이 후레자식!
나는 오늘 속죄하듯
겉 다르고 속다른 쑥대를 위해
내탓이요, 내탓이요, 가슴을 치며
빈속이 뒤집히는 꿈을 지웠다.



3월

밖에는 지금
누가 오고 있느냐
흙먼지 자욱히ㅏㄴ 꽃샘바람
먼 산이 꿈틀 거린다
나른한 햇볕 아래
선잠 깬 나무들이 기지개켜듯
하늘을 힘껏 밀어올리자
조르르 구르는 푸른 물소리
문득 귀가 맑게 트인다

누가 또 내 말 하는지
떠도는 소문처럼 바람이 불고
턱없이 가슴 뛰는 기대로
입술이 트듯 꽃망울이 부푼다


오늘은 무슨 기별 없을까
온종일 궁금한 3월
그 미완의 화폭 위에
그리운 이름들을 써놓고
찬연한 부활을 기다려 본다.


만년필

우리들의 글쟁이 P씨는
눈도 없고 입도 없다
귀도 없고 코도 없이
오직 촉 하나로 버틴다

깨어 있는 혼과 함께
또박또박 心志를 박아가듯
하얀 벌판을 내닫는 苦行
그의 下血은 푸르거나 검었다

글을 쓰는 자세는 늘
엄숙하고 삐딱해
더러는 좀 건방져 보이지만
지체는 본래 고매한 書生
교활한 자의 은폐된 혀를 보면
서슬 푸른 캉이 되어 빛난다

조심해! 우리는 요즘
이미 뱉어버린 말보다
혀끝에 숨은 말이 두렵다
화려한 번개 뒤에
내려치는 벼락처럼

절망을 희망과 바꾸기 위해
어둠을 파내다가 지친 밤
문득 수혈을 기다리는
이 시대의 고독한 書生
P씨의 혈액형은
O형일까? AB형일까?
아니면 Rh마이너스?


채송화

한여름 뙤약빛 아래
하반신이 불구된 아이들이
눈부신 부채춤을 펼친다

하양 노랑 빨강 파랑
싱글벙글 어울려 손에 손잡고
안쓰럽게 돌아가는 화련한 圓舞

나는 지금 넔나간 사람
너희들의 황홀한 律動을 보며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내 멀쩡한 四肢가 부끄럽구나

오냐,오냐.장하다
사무치는 슬픔까지 꽃이 된다면
노래쯤은 한 박자 느려도 좋고
동작이야 이따금 틀려도 좋다

저 죄없는 어린것들을
세상에 보내 天炯을 내린 것은
神의 마지막 실수였을까? 아니면
스스로 아픈 곳을 채우게 하는
눈물겨운 驚異를 시험하는 것일까?


6월

언제쯤 철이 들까
언제쯤 눈에 찰까
하는 짓이 내내 여리고 순한
열댓살적 철부지 아들만 같다
계절은 어느새 저렇게 자라
검푸른 어께를 으스대는가
제법 무성해진 體毛를 일렁거리며
더러는 과격한 몸짓으로
지상을 푸르게 제압하는
6월의 들녘에 서면
나는 그저 반갑고 고마울 따름
가슴속 紀憂를 이제 지운다
뜨거운 생성의 피가 들끓어
목소리도 싱그러운 병성기
저 당당한 6월 하늘 아래 서면
나도 문득 퍼렇게 질려
살아서 숨쉬는 것조차
자꾸만 면구스런 생각이 든다
죄지은 일도 없이
무조건 용서를 빌고 싶은
6월엔


임영조 시인의
<<갈대는 배후가 없다>>中에서

가을山

장항서 열여섯에 시집와
팔년 만에 홀로되신 당숙모
두 남매를 청정하게 키워내
온 마을에 소문이 자자하더니
치마폭에 번지는 가을이 붉다

깃을 치던 새들이 둥지를 뜨듯
자식들은 모두 대처로 나가 살고
고향집에 혼자 사는 당숙모
자식들이 함께 가서 살재도
나는 예가 좋다며
무거운 산이 되어 요지부동이더니

하늘 높아 햇빛 부신 이 가을
가난한 낯술에 취해
웬지 기분이 좋아
온종일 벌개진 얼굴로 주정하듯
주정하듯 혼자 웃는 당숙모
아직도 정정하신 말년이 곱다.


12월

올 데까지 왔구나
막다른 골목
피곤한 사나이가 홀로 서 있다

훤칠한 키에 창백한 얼굴
이따금 무엇엔가 쫓기듯
시계를 자주 보는 사나이
외투깃을 세우며 서성거린다

꽁꽁 얼어붙은 천지엔
하얀 자막처럼 눈이 내리고
허둥지둥 막을 내린 드라마
올해도 나는 단역이었지
뼈빠지게 일하고 세금 잘 내는

뒤돌아보지 말자
더러는 잊고
더러는 여기까지 함께 온
사랑이며 증오는
이쯤에서 매듭을 짖자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입김을 불며 얼룩을 닦듯
온갖 애증을 지우고 가자
이 춥고 긴 여백 위에
이만 총총 마침표 찍고.


제목을 유보한 私信

---너의 소속과 兵科를 다 알았으니 보리밥
많이 먹고 훈련이나 열심히 받아둬라/
66년 가을/申東曄

당신 가신 뒤
침묵의 바다에 그물을 던져
내가 건져올린 건
몇 마리의 서러운 절망이었습니다
그 절망은 때로 밤하늘로 날아가
뒤늧게 빛을내는 별도 되었습니다

높고 먼 당신의 별이
지상의 어둠을 사르는 밤엔
낯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탄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습니다
개중에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머리가 돌아 입원도 하고
또 어떤 친구는
그 별똥을 낚다가 발을 헛디뎌
익사했다는 소문도 들렸습니다

요즘도 나는
침묵의 바다로 나가
여전히 투망질을 하지만
기껏 건져 올린건
판독이 어려운 불랙박스뿐
간절한 句節은 다 놓칩니다
더러는 내가 던진 그물에 걸려
죽지 빠진 새처럼
정말 외롭고 힘이 듭니다.


환절기

밖에는 지금
건조한 바람이 불고
젖은 빨래가 소문 없이 말랐다
생나무가 마르고 산이 마르고
도시의 관절이 삐걱거렸다

사람들은 늘 갈증이 심해
내뱉는 말끝마다 먼지가 났다
가슴이 마르니까 눈만 커진 체
안부를 물어도 딴전이나 부리며
저마다 귀를 빨리 닫았다

저 멀리 좌정한 산이
어께를 들썩이며 기침을 하자
온 마을엔 별의별 풍문이 돌고
긴장한 나무들은 손을 들고 떨었다

세상은 이제
누군가 불만 댕기면
활활 타버릴 인화성 물질
건조주의보가 내려진 날은
단 한 방울 눈물도 보이지 말고
자나 깨나 조심
오나 가나 입조심
어쨌거나 요즘은 환절기니까.

비누

이 시대의 희한한 聖資
親水性 체질인 그는
성품이 워낙 미끄럽고 쾌활해
누구와도 군말 없이 친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온몸을 풀어 우리 죄를 사하듯
더러운 손을 씻어주었다
밖에서 묻혀오는 온갖 불순을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주었다

그는 聖職을 잊고 거리로 나와
냄새 나는 주인을 성토하거나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들의 가장 부끄러운 곳
숨겨온 약점을 말없이 닦아줄 뿐
비밀은 결코 발설하지 않았다

살면 살수록 때가 타는 세상에
뒤끝이 깨끗한 消耗는
언제나 아름답고 아쉽듯
헌신적인 보혈로 生을 마치는
이 시대의 희안한 聖者

나는 오늘
그에게 按手를 받듯
손발을 씻고 세수를 하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몸을 씻었다.


8월의 山

그녀는 늘
태양의 피를 받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늘을 향해 정좌하고 빌었다

어느듯 임신 팔개월인 그녀는
날마다 태敎에 열중하듯
허튼 말을 삼가고
世俗도 가급적 멀리하였다

그녀는 또
서서히 불러오는 배와
난처하게 돌기한 性愛의 구릉을
무성한 숲으로 모두 가리고
쓸데없는 욕정은 자제하였다

드디어 태동이 격렬해지자
더욱 민감해진 그녀는
밤마다 심한 갈증으로 시달려
창백한 달빛에도 살을 데었다

그녀는 요즘
더의를 식히는 아침이슬로
온몸을 자주 씻고 화장기를 지웠다
한때의 방종한 추억을 잊고
이제야 비로소 철드는 여자처럼
母性에 눈을 뜨고 있었다.





무조건 섞이고 싶다
섞여서 흘러가고 싶다
가다가 거대한 山이라도 만나면
감쪽같이 통정하듯 스미고 싶다

더 깊게
더 낮게 흐르고 흘러
그대 잠든 마을을 지나 간혹
맹물같은 女子라도 만나면
아무런 부담없이 맨살로 섞여
짜디짠 바다에 닿고 싶다

온갖 잡념을 풀고
맛도 색깔도 냄새도 풀고
참 밍밍하게 살아온 牲을 지우고
찝질한 양수 속에 生을 키우듯
외로운 섬하나 키우고 싶다

그후 헷빛 좋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증잘 했다가
문듟 그대 잠깬 마을에
비가 되어 만날까
눈이 되어 만날까
돌아온 탕자의 뒤늦은 속죄
그 쓰라린 참회의 눈물이 될까.


회전문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거대한 공룡의齒車
그 견고한 아가리에
전신을 구워놓고 천천히
지문을 날인하듯 힘을 가하면
비로소 접수된다, 나의 하루는
바쁘게 분해 도니다,가시만 남고
(망측하게 거덜난 해체시처럼)
워낙 질겨서 터진 적 없는
이 시대의 伏魔殿
속 검어 어두운 내장 속에서
날마다 반추된 나의 육신은
몇 그램의 자양으로 흡수 됐을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르는 문은 크고 넓으니.....>
그래서 大道道門 앞에는 늘
사람의 그림자도 얼씬 않는가?
닫혔다 하면 열리고
열렸나 하면 닫혀 있는 입
그 미심쩍은 입구로 들어가
온종일 머리를 회전하는 사람들
저녁때면 납작한 오징어로 나온다
단물 빨고 뱉어낸 수박씨처럼
까맣게 흩어져 어둠이 된다.


임영조의 <<갈대는 배후가없다>>中에서



과수원

유월 햇빛 뜨거운 과수원에는
상견례를 막 끝낸 풋내기들이
평화로운 집회를 열고 있다

이따금 푸른 잎 뒤로
은폐된 주먹을 불쑥불쑥 내밀며
풋내나는 구호를 외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돌팔매를 겨누고 있다

그래 던져라,던져!
보호색 깔고 안주하다가
너무 딱딱해진 고정관념은
가차없이 깨뜨려야 돼

간밤에는 비바람 심하게 불고
그때 타락한 녀석들은
머리통이 깨어진 체 버려져
부질없이 썩어가는 급진주의자
(익기전에 떨어진 건
과일이 아니다)

지나보면 알리라
앞날이 아직 창창한 자는
한여름 햇빛과 천둥 번개 속에서
얼마나 부대끼고 견뎌야
비로소 단물이 드는가를

지난해 이상난동 때문에
올농사는 병충해가 극심할 거라고
과수원 주인은 지레 걱정하면서
농약을 독하게 살포하고 있었다.


한란꽃

봄 여름 가을이 가고
눈이 와서 조용한 겨울
참 고고한던 女流의 시를 읽는다

세월의 한켠에 비켜서서
칼끝이 푸른 절개를 지켜
오랜 침묵 끝에 발표한
그녀의 눈부신 開花

누구의 사족이나 발문도 필요없는
저 청정한 변신을 보며
옳거니!옳거니!
나는 다만 무릎을 칠 뿐
허튼 말은 일체 삼가고 싶다

그리고 허락한다면
가장 후한 값으로
그녀의 속 깊은 슬픔
온갖 불행까지 사주고 싶다.


1월

다시 받는다
瑞雪처럼 차고 빛 부신
희망의 白紙 한 장
(시작이 반이다?)
이 門만 열고 가면
무엇이든 잘될 것 같아
턱없이 가슴 설레며
저마다 받아던 시험지 한 장
절대로 여벌은 없다
(이번만은 꼭......)
건강에 대하여
행복에 대하여
장래에 대하여
몇 번씩 고쳐쓰는 답안지
(인생에 정답은 없다!)
나는 지금
再修인가?三修인가?
아니면 未知數인가?


호박꽃

쩔쩔 끓눈 삼복염천
섬남 변두리 척박한 땅에
뿌리를 박듯 좌판을 벌여놓고
아무튼 열심히 사는
내 고향 점례를 보았습니다
남이야 뭐라거나 말거나
전혀 개의치 않고
질펀한 맨땅에 퍼질러 앉아
호호호호 샛노란 웃음도 파는
억척스런 점례를 보앗습니다
더러는 상스러운 이웃과 함께
객적은 농담도 좀 주고받으며
아등바등 온몸으로 기어가
아픈 삶을 움켜쥐는 덩굴손
내 고향 점례를 보았습니다
헤어진 지 스물여섯 해 만에.


풍뎅이

전생에 지은 죄 중에
또 무슨 業報가 남아
무서운 능지를 당해야 하나

한물간 이 나이에
빼앗길 무엇이 남아
남루한 생에 종지부를 못 찍고
무조건 용서빌 듯 살아야 하나

한때는 나도
제법 튼튼한 갑옷에
가볍고 멋진 날개를 달고
하늘을 훨훨 날기도 했는데
세상을 내려다보며
革命을 꿈꾸기도 했는데

아, 이제 나는
손발이 달아나고
목이 비틀린 채
잔등으로 춤을 추는 피에로
사람이 무섭다

제발 살려달라며
정말 살고싶 다며
치욕스런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밥줄을 끊고
내내 잠들고 싶다
末世로 초토화된 땅
그 절망의 아침에
환생하듯 조용히 눈뜨고 싶다.


리모콘

저격을 꿈꾼다
가장 편한 자세로
앉거나 서서 또는 누워서
증오의 화상을 처치하는 꿈
귀신도 곡할 범죄를 꿈꾼다
잠시 숨을 멈추고
긴장을 풀고
일격필살을 노리는
복수의 버튼만 살짝 누르면
세상은 전혀 딴판으로 바뀌고
놈은 쥐도 새도 모르게
눈앞에서 썩 사라지겠지
외마디 비명은커녕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행적은 묘연한 채
별의병 소문만 분분 하겠지
물증은 없고 심증만 가는
이 시대의 테러리스트
언제나 깨어 있는 눈으로
완전무결한 단죄를 꿈꾼다.




간밤에 눈이 내렸다
모드들 세상 잊고 잠이 든 사이
게엄을 선포하듯 눈이 내렸다
천황폐하 만세!
맹목의 가미가제식으로
하얀 복면의 인해전술로
겁없이 뛰어내린 자살특공대
그들은 온 마을을 덮치고
천지를 장악한 채 길을 막았다
함부로 날뛰지 마!
다시는 일으나지 마!
허공을 가르는 채찍소리로
사방을 난폭하게 매도하였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패자
그의 군림은 왜
저토록 위대하고 눈이 부실까?
늙은 제설차 한대가
절갈처럼 엉금엉금 기어와
눈덩이를 힘껏 밀어내지만
정작 밀어낸 것은
꽁꽁 얼어죽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모르고 있으리
저 추운 압제 밑에선 지금
새로운 부활을 꿈꾸는 자의
은밀한 역모가 감행되고 있음을.


7월의 숲


칠월의 숲에 가면
시퍼런 함성이 들린다
이제 한참 겁없고 혈기왕성한
在野의 사내들이
신선한 주장의 피켓을 들고
세상을 향해 사자후를 토한다

저마다 푸른 띠를 두르고
온 산을 점거한 채
물오른 팔을 뻗어 일제히 성토한다

동참하라!
동참하라!
산 자여, 따르라!

오리나무 참나무 때죽나무 밤나무
떡갈나무 엄나무 물푸레나무.....
전후 혹은 좌우로도 기울지 않고
내내 말없던 多數가,아니
신분이 미심쩍은 한해살이 풀까지
기세좋게 일으나 가담하다니

그들은 왜 앉거나 눕는 법 없이
부작정 위로만 뻗는가?
그들은 왜 초지일관
녹색혁명만 고집하다가
결국엔 丹楓으로 지고 마는가?
저 격렬한 口號 앞에서
나는 선뜻 동조하지 못한다
그저 몸둘 바를 모르고 가슴만 뛸 뿐
보호색은 炭色이 무난한 시대
한 마리의 소심한 자벌레처럼.


그는 지금


그는 지금 죽어가고 잇었다.그의 아내와 함께 자식들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돈 되는 일이라면 악착같이 매달려 치부도 하고 내노라 명예도
얻어 세상에 부러울게 없다던 사람,그래서 낯 세울 일이라면
목숨보다 중하게 여겨온 사람.
요즘은 그가 변했다. 평생 남을 돕거나 남의 불행을 덜어준 적 없이 오직 앞만 보고 걸어온 그가 요즘은 참 이상해졋다
얼굴에 거믓거믓 저승꽃 피고 주름살 날로 깊어지면서 거지를 만나면 적선도 하고, 죽은 친구 부인의 월부책도 사주고, 불우이웃돕기에 성금도 냇다.
타고난 건강이 곧 재산이라고 아직도 굳게 믿으며 날마다 바쁘게 뛰는 그는 분명 죽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아니 자신도 모르게 시시각각 시들고 있는 그의 죽음을 보노라면 참 딱하다는 생각뿐,
나 역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두렵지도 않았다.


自敍傳

1943년 10월 19일 밤
하나의 물음표(?)로 시작된
나의 人生은
몇 개의 느낌표(!)와
몇 개의 말줄임표(......)와
찍을까 말까 망설이다 그만둔
몇 개의 쉼표(,)와
아직도 제자리를 못찾아 보류된
하나의 종지부(.)로 요약된다.


50을 바라보며

향방이 더욱 분명한 나이
더 이상 머믓거릴 겨를이 없다
전에는 안 보이던 뒷모습도 보이니
무억을 주고도 멋쩍은 나이
더러는 햇빛 받는 것조차 송구스럽다
눈 높이를 낮추고
귀를 닫고걸어도
저절로 가속이 붙는 나이
자꾸만 침묵이 두렵고
문득 말이 그립다.


장마

하늘나라에는 요즘
달포째 忌中이다
검은 베일로 만면을 가린 채
억장이 무너지는 天宰의 슬픔
그 주체못할 눈물이
온나라에 주룩주룩 빗금을 친다
날개가 촉촉히 젖은 꿈들이
지루한 후렴으로 다시 젖는다

폐하, 그만 고정 하소서
억조창생이 조아려 애도하고
읍소를 거듭한들
저 통한의 곡성은 막을 수 없다
이따끔 역정을 내듯
뇌성벽력으로 천하를 일갈해도
혼자 잘난 자들은
아직도 그 까닭을 모르고

내 이제 禁足令을 선포하노니
너희는 모두 독안에 든 쥐
괜히 허튼 수작 마!
함부로 날뛰면 무차별 난사
누가 어디를 가든
조준한 총구는 백발백중이므로
아예 射線을 넘을 생각 마!

이미 교통은 두절되고
전화도 불통 연애도 불통
오늘도 視界는 제로라니까
해는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간다고 믿어도 좋다
다만 고성방가나 외출을 삼가고
일체의 짐회도 자제하도록

잠시 관뚜껑에 못질소리 그치고
서풍에 쓸리는 검은 베일 사이로
문듯 喪主가 보인다
한여름 더위에 뜨고
오랜 탈수증에 시달린 天宰
수척해진 얼굴이 더 눈부시고 반갑다
그리운 것은 왜
저렇게 서럽고 멀까?


잡식동물

상을 받는다
별로 내세울 일도 없는
오늘 하루 끝
다시 세상을 받는다

과연 받아도 될까
살기 위해 먹는가
먹기 위해 사는가
자문해 볼 겨를도 없이
탐욕의 손이 먼저 숟갈을 든다

하얀 쌀밥에 콩나물국과
배추김치와 깍두기와ㅣ
멸치볶음과 조기매운탕
장조림과 닭도리탕 등등을
골고루 맛있게 씹어 먹는다
아무런 가책 없이 상습적으로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늘 먹어치운 식단은
누군가의 손에 살해된 주검
온갖 시체로 조리된 성찬 이었다

아니 세상에 이럴수가......
내가 잡식성 동물이라니!
남의 시체로 식욕을 체워온
타살을 방조해 온 공범이라니.....

같은 땅에 살면서
누에는 뽕잎만
송충이는 솔잎만
메뚜기는 풀잎만 먹고 사는데
사람인 내가 잡식이라니....

이제야 알겟구나
내 먹성이 잡식이니
생각도 잡스럽고 복잡하듯이
사람의 성격은 왜
때때로 교활하고 포악한가를.


쾌락보다 고통이

위에서 누르는 자의 쾌락보다
밑에서 당하는 자의 고통이
오히려 눈부시고 강하다
눈사태 속 짓눌렸던 보리가
마침내 반역을 결행하듯
파릇파릇 내미는 서슬을 보면.


임영조의 <<갈대는 배후가 없다>>中에서,,

'문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여운]국밥 한 그릇  (0) 2017.12.29
박창기/사랑  (0) 2017.12.28
[스크랩] 시학 강의/ 임영조  (0) 2017.11.03
<이영춘> 오줌발, 별꽃무늬  (0) 2017.10.24
마경덕의 시밭  (0) 2017.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