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밥 한 그릇/전여운
원고개 시장 가마솥 국밥 집 앞 인력시장
구멍 숭숭 난 드럼통에 기세 좋게 타오르던 불길 사그라지고
느릿느릿 기어로른 해가 중참 먹을 때를 가리키지만
오늘도 팔리지 못한 그
가마솥 곁에 쪼그려 앉아있다
회사가 문을 닫아 거리로 나선 지 벌써 3년
한 달에 스무 대가리는 채우며
막일꾼치고 성실하다는 말도 무성했는데,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 떨어지는 벽돌에 맞아 죽은 동료 몸값이
안전모를 쓰지 않아 갯값이라는 말에
현장 소장 멱살을 흔들어 블랙리스트에 오른 그
가마솥에 들어간 개고기처럼 영 보이지 않았다
"아빠 어딜 가?"
놀러 가자고 보채는 아들 녀석에게
"한 대가리 하러 간다" 대답한 후론
아버지 직업을 '대가리 공장에 다님'이라고 적었다는
새벽 집 나서는 뒤통수에 던지는 아내의 물기 젖은 목소리
그 한 대가리도 못 한 지 벌써 달포가 넘어
가마솥 펄펄 끓어오르는 뭉게구름으로 바짝 마른 위장을 달래보는데
"보이소 전 씨, 뜨뜻한 국밥 한 그릇 하고 설거지 좀 거들어 주이소"
환청처럼 들리는 국밥집 아줌마 걸걸한 목소리
오늘따라 부처님 말씀 같다
_ 전여운 시집 [밥 그리고 침대] 學而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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