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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시인의 시들

향기로운 재스민 2018. 5. 28. 07:26

물푸레나무라는 포장마차

이정록

버스는 떠났네
처음 집을 나온 듯 휘몰아치는 바람
너는 다시 오지 않으리, 아니
다시는 오지 마라 어금니 깨무는데
아름다워라 단풍든 물푸레나무
나는 방금 이별한 여자의 얼굴도 잊고
첫사랑에 빠진 듯 탄성을 지르는데
산간 멀리서 첫눈이 온다지
포장마차로 들어가는 사람들
물푸레나무 그 황금 이파리를
수많은 조각달로 고쳐 읽으며
하느님의 지갑에는 저 이파리들 가득하겠지
문득 갑부가 되어 즐겁다가
뚝 떼어서 함께 지고 갈 여자가 없어서
슬퍼지다가, 네 어깨는 작고 작아서
내가 다 지고 가야겠다고 다짐하는 늦가을
막차는 가버렸고, 포장마차는 물푸레나무 그림자로 출렁이는데
주인은 오징어의 배를 갈라 흰 뼈를 꺼내놓는데
비누라면 함께 샤워할 네가 없고
숫돌이라면 이제 은장도는 품지 않아
그렇지만 가슴속에서 둥글게 닳아버린 저것이
그냥 지상의 도마 위로 솟구쳤겠나
그래 저것을 나는 난파밖에 모르는 조각배라 해야겠네
너에게 가는 마지막 배라고 출항표에다 적어놓아야겠네
나에게도 함께 노 저어 갈 여자가 있었지
포장마차는 사공만 가득한 채 정박 중인데
물푸레나무 이파리처럼 파도를 일으키며
가뭇없이 사라져도 되겠네 먼바다로
첫눈 맞으러 가도 되겠네
☆★☆★☆★☆★☆★☆★☆★☆★☆★☆★☆★☆★
사랑

이정록

연초록 껍질에
촘촘 가시를 달고 있는
장미꽃을 한 아름 산다.

네가 나에게 꽃인 동안
내 몸에도 가시 돋는다.

한 다발이 된다는 것은
가시로 서로를 껴안는다는 것

꽃망울에게 싱긋
윙크를 하자
눈물 한 방울 떨어진다.

그래, 사랑의 가시라는 거
한낱 모가 난 껍질일 뿐

꽃잎이 진 자리와
가시가 떨어져 나간 자리, 모두
눈물 마른자리 동그랗다.

우리 사랑도, 분명
희고 둥근 방을 가질 것이다.
☆★☆★☆★☆★☆★☆★☆★☆★☆★☆★☆★☆★
산 하나를 방석 삼아

이정록

단풍나무 아래에
돼지머리가 버려져 있다

돼지는 일생을
서 있거나 누워서 지낸다
앉아 있을 경우는, 오직

새끼를 낳는 암놈이
앞발만 세우고 비척거릴 때다

돼지머리는
제대로 한번 앉아보려고
목덜미 아래를 버린 것 같다

선지피는
단퐁잎이 다 들이마셨나

도끼가 지나간 자리로
산 하나를 꿰차고 있다

잘린 목으로
일찍 떨어진 낙엽을
어루만지고 있다
☆★☆★☆★☆★☆★☆★☆★☆★☆★☆★☆★☆★





구부러진다는 것

이정록

잘 마른
핏빛 고추를 다듬는다
햇살을 차고 오를 것 같은 물고기에게서
반나절 넘게 꼭지를 떼어내다 보니
반듯한 꼭지가 없다, 몽땅
구부러져 있다

해바라기의 올곧은 열정이
해바라기의 목을 휘게 한다
그렇다, 고추도 햇살 쪽으로
몸을 디밀어 올린 것이다
그 끝없는 깡다구가 고추를 붉게 익힌 것이다
햇살 때문만이 아니다, 구부러지는 힘으로
고추는 죽어서도 맵다

물고기가 휘어지는 것은
물살을 치고 오르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말하겠다
내 마음의 꼭지가, 너를 향해
잘못 박힌 못처럼
굽어버렸다

자, 가자!

굽은 못도
고추 꼭지도
비늘 좋은 물고기의 등뼈를 닮았다
☆★☆★☆★☆★☆★☆★☆★☆★☆★☆★☆★☆★
내 품에 그대 눈물을

이정록

내 가슴은 편지봉투 같아서
그대가 훅 불면 하얀 속이 다 보이지

방을 얻고 도배를 하고
주인에게 주소를 적어와서
그 주소로 편지를 보내는 거야
소꿉장난 같은 살림살이를 들이는 사이
우체부 아저씨가 우리를 부르면
봉숭아 씨처럼 달려나가는 거야

우리가, 같은 주소를 갖고 있구나
전자랜지 속 빵봉지처럼
따뜻하게 부풀어오르는 우리의 사랑

내 가슴은 보도밭 종이봉지야
그대 슬픔이 알알이 여물 수 있지
그대 눈물의 향을 마시며 나는 바래어가도 좋아
우표를 붙이지 않아도 그대 그늘에 다가갈 수 있는
내 사랑은 포도밭 종이봉지야

그대의 온몸에, 내 기쁨을
주렁주렁 매달고 가을로 갈 거야
긴 장마를 건너 햇살 눈부신 가을이 될 거야
☆★☆★☆★☆★☆★☆★☆★☆★☆★☆★☆★☆★
다시 나에게 쓰는 편지

이정록

콩나물은
허공에 기둥 하나 밀어 올리다가
쇠기 전에 머리통을 버린다

참 좋다
쓰라린 새벽
꽃도 열매도 없는 기둥들이
제 몸을 우려내어
맑은 국물이 된다는 것

좋다 참
좋은 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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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나무

이정록

땅바닥으로 머리를 디미는 시래기의 무게와
옆구리 찢어지지 않으려는 어린 대추나무의 버팅김이
떨며 떨리며, 겨우내 수평의 가지를 만든다

봄이 되면 한없이 가벼워진 시래기가
스런스런 그네를 타고, 그해 가을
버팀목도 없이 대추나무는
닷 말 석 되의 대추알을 흐드러지게 매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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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밥

이정록

화살도 싫고 창도 싫다
마디마디 밥 한 그릇 품기까지
수 천년을 비워왔다
합죽선도 싫고 죽부인도 싫다
모든 열매들에게 물어봐라
지가 세상의 허기를 어루만지는
밥이라고 으스대리니,
이제 더는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
땔감도 못되는 빈 몸뚱어리가
밥그릇이 되었다 층층 밥솥이 되었다
칼집처럼 식식대는 사람아
내가 네 밥이다 농담도 건네며
아궁이처럼 큰 숨 들이마셔라
불길을 재우고 뜸들일 줄 알면
스스로 밥이 된 것이다
하늘 끝 푸른 굴뚝까지
칸 칸의 방고래마다 밥솥을 걸고
품바, 품바, 품바
푸르게 타오르는 통큰 대나무들
☆★☆★☆★☆★☆★☆★☆★☆★☆★☆★☆★☆★
더딘 사랑

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말라
달은 윙크 한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
마디

이정록

마디와 마디 사이에
두 가닥씩 칼금이 그어져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나무는
그 등고선의 기울기와 간격으로
하늘 높이 몸을 디민다

새가 대나무 꼭지에 앉는다
수많은 마디들이 새의 무게를 갖고 논다
또한 새떼의 수많은 뼈마디가
대나무를 흔들며 합창을 한다

바람의 마디와 하늘의 마디도
대밭, 둥근 방으로 몸을 퉁기며 노닌다

시끌벅적 앞다투는
댓이파리들의 노래 위에 눈이 쌓이면
대나무는 간혹 몸을 꺾는다
백설의 마디며 물의 마디를 모르는
이파리들의 고성방가들

대숲 속에는 마디를 모르는 것들이
바닥을 덮는다, 켜켜이
썩어 가는 이파리에게 마디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하얀 대뿌리, 그 잘디잔 말씀이 뻗어나간다
☆★☆★☆★☆★☆★☆★☆★☆★☆★☆★☆★☆★


이정록

잔 바람에도 바닥으로 쏠리는
담장 위 호박 넝쿨을 위해
마루 밑을 뒹구는 박카스
작은 병 속에 물을 담는다
이제 호박 줄기 상하지 않도록
사료푸대 오려 붕대처럼 감고
광목실로 묶는다
호박 줄기 지긋 잡아당기며
고드랫돌처럼 작은 병들이 매달린다
피로 회복과 자양 강장이
팽팽하게 힘 겨루기를 시작한다
아슬아슬 균형의 틈을
비집고 가는 오른손

다행이다, 모가지는
묶어 매달기 알맞게 잘록하다
어둠을 짚어 나가는, 덩굴손을 위하여
네 목과 내 목은 수평으로 짱짱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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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부러진 숟가락

이정록

어머니는 목이 부러진
내 알루미늄 숟가락을 버리지 않으셨다
부뚜막 작은 간장종지 아래에다 놔두셨는데
따뜻해서 갖고 놀기도 좋았다 눈두덩이에도 대보고
배꼽 뚜껑을 만들기도 했다
둥근 조각칼처럼 생겼던 손잡이는
아끼기까지 하셨다 고구마나 감자를 삶을 때
외길로 뚫고 간 벌레의 길을 파내시는 데
제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를 찾아뵐 때마다, 내 몸은
탄저병에 걸린 사과나 굼벵이 먹은 감자가 되어
한 켜 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다
숫제, 내가 한 마리 벌레여서
밤고구마나 당근의 단단한 속살을 파먹고 있고
내 숟가락은 아직 생기지도 않았고
어머니는 외할머니 댁 추녀 밑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그런 벌레 알 같은 생각을 꼼지락거리기도 한다
숟가락 손잡이로 둥글고 깊게
나를 파고 나를 떼내다가
지금은 없는 간장종지 아래에
지금은 없는 내 목 부러진 숟가락을
모셔두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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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녹

이정록

고목이 쓰러진 뒤에
보았다, 까치집 속에
옷걸이가 박혀 있었다.
빨래집게 같은 까치의 부리가
바람을 가르며 끌어올렸으리라
그 어떤 옷걸이가 새와 함께
하늘을 날아봤겠는가, 어미새 저도
새끼들의 외투나 털목도리를 걸어놓고 싶었을까
까치 알의 두근거림과 새끼 까치들의
배고픔을 받들어 모셨을 옷걸이,
까치 똥을 그을음처럼 여미며
구들장으로 살아가고 싶었을까
아니면, 둥우리 속 마른 나뭇가지를
닮아보고 싶었을까
한창 녹이 슬고 있었다
혹시, 철사 옷걸이는
털실을 꿈꾸고 있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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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꿈꾸는 새

이정록

외발로 서있는 두루미며 백로들은
끝내 나무가 되라는 유언을 들은 게 분명하다
날갯짓마다 나뭇가지 비비는 소리 서걱거린다

외발로 서 있는 그들의 몸통은
무슨 단 하나의 필사적인 열매 같다
아직은 솜털도 못 벗은 풋것이라고
꽃잎 같은 부리를 열어 피라미며 미꾸라지
닥치는 대로 집어넣는다
열매를 흉내내기 전에는 한 송이 꽃봉오리였다는 듯이
벌 나비 수도 없이 들락거렸다는 듯이

노을 받은 커다란 열매들은
제 꽃잎으로 강물을 찍어 올려 닦고 또 닦는다
겨드랑이에 꽃잎을 묻은 채, 강물에
가느다란 밑둥치와 실 뿌리를 담그고 있는 아름다운 열매들
간혹 꽃 이파리를 물 속에 집어넣어
뿌리근처에 붙여보기도 하는
저 횃불 같은 열매들

끝내 숲이 되리라
울음소리에서 장작 타는 냄새 피어오른다
강 안개 속에는, 후두둑 후두두둑
열매 떨어지는 소리 그득하다
☆★☆★☆★☆★☆★☆★☆★☆★☆★☆★☆★☆★
우표

이정록

우표의 뒷면은
얼어붙은 호수 같다
가장자리를 따라 얼음 구멍까지 뚫어놓았다

침이라도 바를라치면
뜨건 살갗 잡아당기는 것까지
우표는 쩔걱쩔걱한 얼음판을 닮았다

우표와 마주치면 언제라도
혓바늘 서듯 그대 다시 살아나
지난 몇십 년의 겨울을 건너가고 싶다
꼬리지느러미 좋은 화염의 추억에 초고추장 찍어
아, 그대의 입천장 들여다보고 싶다

편지봉투를 불자, 아뜩하게
얼음 깨지는 소리며 빙어 뛰어 오르는 소리 올라온다
불면의 딱따구리가 내 늑골에다 파놓은 구멍들
그 어두운 우체통에 답장을 넣어다오

저 얼음 우표가 봄으로 가듯
나의 경계도 소통을 꿈꾼다

우표의 울타리, 빙어알만 한 구멍들도
반절로 쪼개지며 온전한 한 장의 우표가 된다

우표의 뒷면에 혀를 댄다
입술과 우표가 나누는 아름다운 내통
입맞춤의 떨림이 사금파리처럼 싸하다

그대 얼음장 안에 갇혀 있는 한
성에 가득한 혓바닥, 그 끝자리에
언 목젖을 가다듬는 내가 있다
☆★☆★☆★☆★☆★☆★☆★☆★☆★☆★☆★☆★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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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이정록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으니
두부장수는 종을 흔들지 마시고
행상트럭은 앰프를 꺼주시기 바랍니다
크게 써서 학교 담장에 붙이는 소사아저씨 뒤통수에다가
담장 옆에 사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한마디씩 날린다
공일날 운동장 한번 빌려준 적 있어
삼백육십오일 스물네 시간 울어대는
학교 종 한번 꺼달란 적 있어
학교 옆에 사는 사람은 두부도 먹지 말란 거여
꽁치며 갈치며 비린 것 한번 맛볼라치면
버스 타고 장에까지 갔다오란 거여
차비는 학교에서 내줄 거여. 도대체
생명이 뭔지나 알고 분필 잡는 거여
호박넝쿨 몇 개 얹었더니 애들 퇴학시키듯 다 잘라버린 것들이
말 못하는 담벼락 가슴팍에 못질까지 하는 거여
애들이 뭘 보고 배울 거여. 이웃이 뭔지
이따위로 가르쳐도 된다는 거여
☆★☆★☆★☆★☆★☆★☆★☆★☆★☆★☆★☆★
저녁

이정록

곧 어두워지리라
호들갑 떨지 마라
잔 들어라,
낮달은 제 자리에서 밝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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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살 사이의 젖은 그늘

이정록

백 대쯤
엉덩이를 얻어맞은 암소가
수렁논을 갈다말고 우뚝 서서
파리를 쫓는 척, 긴 꼬리로
얻어터진 데를 비비다가
불현듯 고개를 꺾어
제 젖은 목 주름을 보여주고는
저를 후려 팬 노인의
골진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 긴 속눈썹 속에
젖은 해가 두 덩이
오래도록 식식거리는
저물녘의 수렁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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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의 힘

이정록

불구덩이를
지나온 기왓장

그 불기운을 빨아올려야겠다고
대웅전 기와지붕 위에서 풀들이 자란다

(뿌리가 들린 生은
불기운을 먹고 자란다)

그러나,
저 허공에 떠있는
풀뿌리의 힘으로

부처의 이마엔 주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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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사과의 주름살

이정록

어물전 귀퉁이
못생긴 과일로 탑을 쌓는 노파

뱀 껍질이 풀잎을 쓰다듬듯,
얼마나 보듬었는지 풋사과의 얼굴이 빛난다
더 닳아서는 안 될 은이빨과
국수 토막 같은 잇몸과, 순전히
검버섯 때문에 사온 낙과
신트림의 입덧을 추억하는 아내가
떫은 핀잔을 늘어놓는다
식탁에서 냉장고 위로, 다시
세탁기 뒤 선반으로 치이면서
쪼글쪼글해진 풋사과에 과도를 댄다
버리기에 마음 편하도록 흠집을 만들다가
생각없이 과육을 찍어올린다
떫고 비렸던 맛 죄다 어디로 갔나
몸안을 비워 단물 쟁여놨구나
가물가물 시들어가며 씨앗까지 빚었구나
생선 궤짝에 몸 기대고 있던 노파
깊은 주름살 그 안쪽,
가마솥에도 갱엿 쫄고 있을까
낙과로 구르다 시든 젖가슴
그 안쪽에도 사과씨 여물고 있을까

주름살이란 것
내부로 가는 길이구나
연 살처럼, 내면을 버팅겨주는 힘줄이구나
☆★☆★☆★☆★☆★☆★☆★☆★☆★☆★☆★☆★
해열제

이정록

그대보고 싶을수록
늪이 생각납니다
늘 젖어 있는 뿌리
비늘마다 물이끼 푸르른 물고기들
지느러미를 세운 채 알을 낳고
넓은 이파리 위론
배때기 하얀 개구리가
깜짝 뒷다리를 감추는 오후
하늘 한 자락
콱 베어 물고 우거지는 늪
깊은 가슴을 생각합니다
내 마음속
악어의 이마가 펄펄 끓습니다
☆★☆★☆★☆★☆★☆★☆★☆★☆★☆★☆★☆★
햇살은 어디로 모이나

이정록

눈도 녹지 않았는데
어찌 그리 양달을 잘 아시는가
나물을 뜯으려고 바구니를 내려놓은 자리
거기다, 그곳이 햇살의 곳간이다
갈퀴 손으로 새순을 어루만지자
오물거리던 햇살이 재게 할머니의 등에 오른다
무거워라 포대기를 추스리자
손자 녀석의 터진 볼에 햇살이 고인다
엄마 잃은 생떼의 입술이 햇살의 젖꼭지를 빤다
햇살의 맞은편, 그러므로 응달은
할머니의 숯검댕이 가슴 쪽에 서려 있다
늘그막에 핏발 서는 빈 젖꼭지에 있다
항아리 숫돌에 녹물을 지운 나물 칼
응달은 자신의 남은 빛을 그 칼날에다 부려놓고
방금 새순을 바친 풀뿌리로 스며든다
우글거리던 햇살의 도가니, 그 밑자리로
응달은 겨울잠 자러 가는 실뱀처럼 꼬리를 감춘다
양달은 지금 어디에다 아랫목을 들였나
아기가 갑자기 제 트림에 놀라 운다
아기의 뱃속 어딘가에서
빙벽 하나 무너져내렸는가
☆★☆★☆★☆★☆★☆★☆★☆★☆★☆★☆★☆★
햇살의 경문(經文)

이정록

날고 싶은 것들이 죽어 흙이 되면 기왓장으로 태어난다
절마당 가득한 저 기왓장들은 곧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새를 꿈꾸었던 영혼의 깃털마다 가족들의 이름과 골목길 복잡한 주소들이

적혀 있다
커다란 새 한마리가 갈비뼈 뒤편에 업장을 서려물고 있는 것이다
날고 싶었던 것들의 극락왕생을 낙서하지 마라 목어처럼 텅 빈 새의 뱃속

에 알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법당문이나 환하게 열어제쳐라
그리하여 그 새 똥구멍으로 들이치는
찬란한 햇살에 눈이나 부비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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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녹

이정록

고목이 쓰러진 뒤에
보았다, 까치집 속에
옷걸이가 박혀 있었다.
빨래집게 같은 까치의 부리가
바람을 가르며 끌어올렸으리라
그 어떤 옷걸이가 새와 함께
하늘을 날아봤겠는가, 어미새 저도
새끼들의 외투나 털목도리를 걸어놓고 싶었을까
까치 알의 두근거림과 새끼 까치들의
배고픔을 받들어 모셨을 옷걸이,
까치 똥을 그을음처럼 여미며
구들장으로 살아가고 싶었을까
아니면, 둥우리 속 마른 나뭇가지를
닮아보고 싶었을까
한창 녹이 슬고 있었다
혹시, 철사 옷걸이는
털실을 꿈꾸고 있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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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꿈꾸는 새

이정록

외발로 서있는 두루미며 백로들은
끝내 나무가 되라는 유언을 들은 게 분명하다
날갯짓마다 나뭇가지 비비는 소리 서걱거린다

외발로 서 있는 그들의 몸통은
무슨 단 하나의 필사적인 열매 같다
아직은 솜털도 못 벗은 풋것이라고
꽃잎 같은 부리를 열어 피라미며 미꾸라지
닥치는 대로 집어넣는다
열매를 흉내내기 전에는 한 송이 꽃봉오리였다는 듯이
벌 나비 수도 없이 들락거렸다는 듯이

노을 받은 커다란 열매들은
제 꽃잎으로 강물을 찍어 올려 닦고 또 닦는다
겨드랑이에 꽃잎을 묻은 채, 강물에
가느다란 밑둥치와 실 뿌리를 담그고 있는 아름다운 열매들
간혹 꽃 이파리를 물 속에 집어넣어
뿌리근처에 붙여보기도 하는
저 횃불 같은 열매들

끝내 숲이 되리라
울음소리에서 장작 타는 냄새 피어오른다
강 안개 속에는, 후두둑 후두두둑
열매 떨어지는 소리 그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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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

이정록

우표의 뒷면은
얼어붙은 호수 같다
가장자리를 따라 얼음 구멍까지 뚫어놓았다

침이라도 바를라치면
뜨건 살갗 잡아당기는 것까지
우표는 쩔걱쩔걱한 얼음판을 닮았다

우표와 마주치면 언제라도
혓바늘 서듯 그대 다시 살아나
지난 몇십 년의 겨울을 건너가고 싶다
꼬리지느러미 좋은 화염의 추억에 초고추장 찍어
아, 그대의 입천장 들여다보고 싶다

편지봉투를 불자, 아뜩하게
얼음 깨지는 소리며 빙어 뛰어 오르는 소리 올라온다
불면의 딱따구리가 내 늑골에다 파놓은 구멍들
그 어두운 우체통에 답장을 넣어다오

저 얼음 우표가 봄으로 가듯
나의 경계도 소통을 꿈꾼다

우표의 울타리, 빙어알만 한 구멍들도
반절로 쪼개지며 온전한 한 장의 우표가 된다

우표의 뒷면에 혀를 댄다
입술과 우표가 나누는 아름다운 내통
입맞춤의 떨림이 사금파리처럼 싸하다

그대 얼음장 안에 갇혀 있는 한
성에 가득한 혓바닥, 그 끝자리에
언 목젖을 가다듬는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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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