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꽃

[스크랩] 세월이 가면 / 박인환

향기로운 재스민 2011. 8. 11. 04:09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이름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박인환 전집 (실천문학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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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의 원산지를 명확히 증명키는 어렵지만, 탤런트 최불암의 모친이 운영했다는 명동의 대폿집 ‘은성’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전해져오고 있다. 술을 마시다 불현듯 ‘필이 꽂혀’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고 동석한 극작가 이진섭이 곡을 붙여 나애심이 불렀다는 ‘세월이 가면’은 그 후 현인을 거쳐 박인희의 노래로 더 유명해졌다.

 

 준수한 용모의 ‘명동신사’ 박인환에 얽힌 일화가 여럿 전해지고 있는데, 이 시를 쓰기 전날인가 그날 낮인가에 그의 첫사랑 옛 애인이 묻힌 망우리 공동묘지를 찾았다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이무렵 박인환은 기혼이었고, 그의 생전 유일한 시집에다 ‘아내 이정숙에게 보낸다’는 헌사를 남길 정도로 부부의 금실은 좋았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이름은/ 내 가슴에 있네’라며 노래할 만큼의 추억 속 첫사랑이라면 못 잊을 여인임은 분명한 듯하다. 그리고 박인환은 ‘세월이 가면’을 쓰고 일주일 뒤 세상을 떠났다. 죽기 3일 전에 평소 흠모하던 시인 이상 추모의 밤이 있었는데, 이날부터 매일 깡술을 퍼마셨다고 한다.

 

 당시 박인환은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렸다. 세탁소에 맡긴 스프링코트를 찾을 돈이 없어서 두꺼운 겨울외투를 봄까지 걸치고 다녔다. 빈속에 연일 마셔댄 술이 화근이었고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친구들은 그의 관 속에다 생시 그렇게나 좋아했던 조니워커와 카멜담배를 넣어 주고 흙을 덮었다. 짧은 생애 보헤미안처럼 고뇌하고 방황했던 시인은 그렇게 갔다.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서늘한 추억만 남긴 채 세월은 흘렀다. 하지만 그의 사랑노래는 가을비 같은 촉촉한 서정성으로 오래도록 리바이벌되고 있다. 허무와 손잡은 정신적 귀족주의자. 강원도 인제가 낳은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을 기리기 위한 문학관이 그의 고향에서 곧 준공된다. 그의 예술혼과 낭만이 영원토록 사람들의 가슴에 남게 되었음을 반긴다. 그리고 문화인물 상품을 강원도만큼 효과적으로 잘 활용하고 있는 곳은 없다란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메모 : 그녀와 함께 다시 한번. 그 벤치에 앉아 나뭇잎 떨어지는 것을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