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하늘

[스크랩] [정호승 외] 검은 민들레 외 3편

향기로운 재스민 2012. 5. 25. 16:19

 

 

 

 

영동선 녹동역 - 삶의 미미한 낌새까지 헤아리는 산간 간이역

 

녹동역

 

        곽대근

 

기차가 지나간 뒤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간간이 초가을의

두꺼워진 잎새 속에 머물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산을 넘지 못하고

태백산맥으로 이어지는 레일 위에 서성거린다

이름처럼 묘한 녹동역

노룻재를 굽이굽이 돌다가

내려다본 세상은

마음속이 텅 빈

찾지 않는 대합실과 같다

우리도 언젠가는 잊혀질 때가 있고

저 열차의 뒷모습처럼

희미한 삶을 살다가

그리우면 한 번 서 본 역을 찾는다.

 

 

영동선 승부역- 하늘과 꽃밭도 세 평, 고요동 세 평

 

그 소리들

 

               나희덕

 

승부역에 가면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구름 옮겨가는 소리

지붕이 지붕에게 중얼거리는 소리

그 소리에 뒤척이는 길 위로

모녀가 손잡고 마을로 내려오는 소리

발 밑의 흙들이 자글거리는 소리

계곡물이 얼음장 건드리며 가는 소리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송아지

다시 고개 돌리고 여물 되새기는 소리

마른 꽃대들 싸르락 거리는 소리

소리만 이야기 하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겨울 승부역

그 소리들로 하염없이 붐비는

 

고요도 세 평

 

 

 태백선 고한역 - 아직도 눈부신 폐광의 아침을 기억한다

 

검은 민들레

 

                    정호승

 

봄은 왔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밤새도록 술상을 두드리던 나무젖가락처럼

청춘은 부서지고

이제 내 마음의 그림자도 너무 늙었다

사람과 사람의 그림자 사이로 날아다니던

새들은 보이지 않고

고한역은 열차도 세우지 않는다

밤새워 내 청바지를 벗기던 광원들은

다 어디로 흘러가 새벽이 되었는지

버력더미에 이슬이 내리는

눈부신 폐광의 아침

진폐증에 걸린 똥개 한 마리가

기침을 하고 지나가는 단란주점 옆

피다 만 검은 민들레의

쓸쓸한 미소

 

 

영동선 양원역 - 산간주민의 꿈과 의지를 새긴 상징물

 

양원역에 가면

 

               강봉환

 

눈과 귀와 가슴으로만 가야하는 역이 있다

하늘아래 땅이 있고

그리고 거기 역처럼 보이는

어쩌면 걸어서 가는 게 휠씬 나은 역이 있다

물어물어 찾아 와도 다시 갈 길이 먼 역이 있다

물 맑은 계곡에 손 한번 담그고 한참을 산야에 묻혀

그렇게 강줄기 따라 가야만 하는 역이 있다

좁은 길 따라 어르신에게 양보하며 물어 찾아보면

다리를 지나고 폐교분교를 지나 마치 성냥갑처럼

거기엔 간판을 보고서야 겨우겨우 여기가 양원역임을....

번듯한 플랫폼 간판마저도 없는 간이역엔

주민들의 애환만이 서려있는 하늘아래 역이 있다

철길 따라 걸어서 가는 게 왠지 편안한 양원역,

이 마을사람들이 지어서 붙인 양원역이라는 간판부터

그렇게 보통사람들만의 역이 거기에 우둑 서 있다.

 

 

 다들 떠나고 없는 텅 빈 고향집에서 해마다 피는 5월의 꽃을 보고 있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면

 그 땐 내 몸도 가을처럼 상처를 받겠지

 [ 녹동역 저자 풍낙산 곽대근 시인]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풍낙산 원글보기
메모 : 녹동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