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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인은 언제나/ 권순진

향기로운 재스민 2014. 10. 20. 07:53

 

 

 

시인은 언제나/ 권순진

 

갖춘꽃의 총화이기 보다는

꼬부라진 암술이거나 수술의 꽃밥,

꽃잎과 꽃받침의

애매한 경계쯤이나 될 것입니다.

무지개와 구름과

비에 머무는 시선만이 아니라

진흙 속 무지렁이와 함께 섞여

돌돌돌 굴러가지도 못하는

한 알 콩자갈의 변명 같은 것입니다.

잉잉거리는 바람과

봉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에도

밥이 넘어가지 않고

복받치는 울음입니다.

사막을 걷는 이의 수통에 남은

마지막 물 한 방울이며

오염에 더욱 선명한

저 강 물비늘의 표정입니다

 

- 시집『낙법』(문학공원,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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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이 ‘시의 날’입니다. 1987년 당시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이었던 권일송 시인과 시를 무척 사랑했던 소년한국일보 김수남 사장이 함께 발의하고, 시낭송계의 대부라 할 수 있는 당시 한국일보 김성우 논설위원이 동의, 여기에 한국시인협회가 동참함으로써 시의 날이 제정되었습니다. 11월 1일로 기념일을 정한 것은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소년'지 창간호의 발간일이 1908년 11월 1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시의 날을 선포하면서 ‘詩는 삶과 꿈을 가꾸는 언어의 집이다. 우리는 시로써 저마다의 가슴을 노래로 채워 막힘에는 열림을, 어둠에는 빛을, 끊어짐에는 이어짐을 있게 하는 슬기를 얻는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시인의 권익과 위상을 높여가고, 시정신의 사회적 확산을 통해 무너져가는 인성의 회복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려는 취지가 더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시와 시인의 역할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할까요? 빅토르 위고는 시인을 ‘신성모독의 나날에 보다 좋은 날들을 준비하러온 유토피아적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참된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이기보다 구도의 사도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시를 짓는 것은 그래서 구도의 길이며, 자신의 구원은 물론 인류의 구원에 봉헌하는 행위라 하겠습니다. 언어에 의한 진지한 열망이며 공존의 염원인 것입니다.

 

 오래전 한국을 찾은 작가 게오르규는 시인이란 그 시대의 산소량을 재는 ‘잠수함 속 토끼’같은 존재라 했습니다. 시인은 잠자지 않는 촉수요, 밤에도 깨어 있는 정서의 불침번입니다. 시인은 그 시대의 유정란이어야 하며, 그 시대가 품고 보살펴서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와야 하는 당위여야 합니다. 하지만 시는 자신은 물론 굶주리는 이의 위장에 하등의 현실적 도움이 되지 못하는 추상의 장미입니다.

 

 시인은 투철한 사색가도 용맹한 실천가도 아닙니다. 시의 봉우리는 높지 않습니다. 시인은 위대하기보다 절실하길 원하며 낮은 곳에서의 공감자이고자 합니다. 공동체와 삶의 현장 속의 고뇌를 집약하고, 바른 가치와 대의를 섬기면서 인류의 정신사 가장 후미진 곳, 외로운 높이에서 내뿜는 쉼 없는 육성입니다. 그 목청으로 여러분들의 삶이 조금이나마 깊어지고 따스해지기를 염원할 따름입니다.

 

 참고로 다음은 2004년 한국시인협회장이 발표한 <시인선서>의 내용입니다.

 “시인이여. 절실하지 않고, 원하지 않거든 쓰지 말라.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으면 구하지 말라. 스스로 안에서 차오르지 않고 넘치지 않으면 쓰지 말라. 물 흐르듯 바람 불듯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을 좇아가라. 가지지 않고 있지도 않은 것을 다듬지 말라. 세상의 어느 곳에서 그대 시를 주문하더라도 그대의 절실함과 내통하지 않으면 응하지 말라. 그 주문에 의하여 시인이 시를 쓰고 시 배달을 한들 그것은 이미 곧 썩을 지푸라기詩이며, 거짓말詩가 아니냐. 시인이여, 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의 심연을 거치고 그대의 혼에 인각된 말씀이거늘, 치열한 장인의식 없이는 쓰지 말라. 시인이여, 시여,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 온 세상이 권력의 전횡에 눌려 핍박받을지라도 그대의 칼날 같은 저항과 충언을 숨기지 말라. 민주와 자유가 유린당하고, 한 시대와 사회가 말문을 잃어버릴지라도 시인이여, 그대는 어둠을 거쳐서 한 시대의 새벽이 다시 오는 진리를 깨우치게 하라. 그대는 외로운 이, 가난한 이, 그늘진 이, 핍박받는 이, 영원 쪽에 서서 일하는 이의 맹우(盟友)여야 한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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