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 1

시인님들 자화상

향기로운 재스민 2016. 5. 17. 07:40

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정본  윤동주 전집」. 문학과지성사. 200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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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 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흙으로 바람 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를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시집『화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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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

 

    노 천명

 

 

  오 저 일촌 오푼 키에 이 촌이 부족한 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하기 어려워한다.

  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

  전 시대 같으면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는 클럼지한 손에 예술품답지않게 얹혀져 가날픈 몸에 무게를 준다.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격은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을 게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세 온스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 데가 있는 것을 잘 알 것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그만 유언비어에도 비겁하게 삼간다 대(竹)처럼 꺾어는질망정

  구리(銅)처럼 휘어지며 구부러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가끔 자신을 괴롭힌다.

 

 

 

(「산호림」. 1938: 「사슴 --노천명 시전집」. 솔. 199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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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족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산호림」. 1938: 「사슴 --노천명 시전집」. 솔. 199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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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김현승

 


내 목이 가늘어 회의에 기울기 좋고
혈액은 철분이 셋에 눈물이 일곱이기
포효(咆哮)보담 술을 마시는 나이팅게일-


마흔이 넘은 그보다도
밤이 쪼들어
연애엔 아주 실망이고


눈이 커서 눈이 서러워
모질고 사특하진 않으나
신앙과 이웃들에 사뭇 길들기 어려운 나-


사랑이고 원수고 몰아쳐 허허 웃어버리는
비만한 모가지일 수 없는 나-


내가 죽는다
단테의 연옥에선 어느 비문(扉門)이 열리려나.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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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

 

  유안진

 

 

  한 오십년 살고 보니
  나는 나는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라
  비와 이슬이 눈과 서리가
  강물과 바닷물이 뉘기 아닌 바로 나였음을 알아라


  수리부헝이 울어대는 이 겨울도 한 밤중, 뒷뜰 얼음 밭을 치달리는 눈바람에, 마음 헹구는 연인, 가슴속 용광로에 불지피는 황홀한 거짓말을, 오오 미쳐볼 뿐 대책 없는 불쌍한 희망을, 내 몫으로 오늘 몫으로 사랑하여 흐르는 일


  삭아질수록 새우젓갈 맛나듯이, 때얼룩에 쩔을수록 인생다워지듯이, 산다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도, 때 묻히고 더럽혀지며, 허상에 넋을 잃어 진실을 놓치며, 죄업에 혼이 빠져 정직을 못 가리며, 어디론가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다


  나란히 누웠어도 서로 다른 꿈을 꾸며, 끊임없이 떠나고 떠도는 것이다, 멀리 떠나갈수록, 가슴이 그득히 채워지는 것이다, 갈 데까지 갔다가는 돌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만이 살 곳은 아니다, 허공이 오히려 더 살만한 곳이며, 흐르고 떠도는 것이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리
  문득 뒤 돌아다 보니
  나는 나는 흐르는 구름의 딸이요
  떠도는 바람의 연인이었어라.

 

 

 

(뉴욕일보 『시로 여는 세상』 / 2007.12. 24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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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최금녀

 

 

기생이 되려다 못된 년들이
글을 쓴다는
김동리 선생님의 말씀으로
화끈 달아오르는 내 얼굴,
그 말씀에 주를 달아준 분은
더운 차 한 잔을 밀어놓고 사라지며
"끼가 있다는 뜻"이란다


 그렇다
느지막하게 내린 신끼로 굿을 치고 다니는데
선무당 사람잡는 소리가 등을 훑어내리고
옷 속으로 식은 땀 쭉 쭉 흐른다
애무당 하루라도 날춤을 추지 않으면
아쟁이, 대금소리에 삭신이 아프고 저려서
색색이 옷 차려입고 신 바람을 맞으며
동서남북 발길 안 닿는데 없다
 

세상만사 굿 한방이면 끝나는 듯
작두날 위에서 물구나무 서며
신끼 휘두르니 위태 위태하다
소리도 배워
사설도 익혀
한거리 제끼면
구경꾼도 모여들어 신기한 듯
늦게 배운 도둑질이 가여운 듯
박수도 쳐주어
신명 끓어 넘치는
기생 못된 선무당이여.

 

 

 

-시집『큐피드의 독화살』(종려나무,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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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신현림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시집『세기말 블루스』(창작과비평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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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이수익

 

 

제 몸을 부수며
鐘이
운다.


울음은
살아있음의 명백한 증거,
마침내 깨어지면 울음도 그치리.


지금
존재의 희열을 숨차게 뿜으며
하늘과 땅을 건너 느릿느릿 울려퍼지는

 

 

 

-시집『시와시학』(2001,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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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김초혜

 


오늘은 오늘에 빠져버렸고
내일은 내일에 허덕일 것이다
결박을 풀고
집을 떠나려 하나
벗을 것을 벗지 못하는
거렁뱅이라

 

 

 

―계간『주변인과詩』(2010.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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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한하운

 


한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
한번도 울어본 일이 없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
그러한 슬픔에 굳어버린 나의 얼굴.
도대체 웃음이란 얼마나
가볍게 스쳐가는 시장끼냐.
도대체 울음이란 얼마나
짓궂게 왔다가는 포만증飽滿症이냐.
한때 나의 푸른 이마 밑
검은 눈썹 언저리에 매워본 덧없음을 이어
오늘 꼭 가야 할 아무데도 없는 낯선 이 길머리에
쩔룸 쩔룸 다섯 자보다 좀더 큰 키로 나는 섰다.
어쩌면 나의 키가 끄으는 나의 그림자는
이렇게도 우득히 웬 땅을 덮는 것이냐.
지나는 거리마다 쇼윈도 유리창마다
얼른 얼른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얼굴.

 

 

 

― 『한하운시초』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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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II

 

박용래

 

 

한 오라기 지풀일레
아이들이 놀다 간
모래서
무덤을
쓰을고 쓰는
강둑의 버들꽃
버들꽃 사이
누비는
햇제비
입에 문
한 오라기 지풀일레
새알,
흙으로
빚을 경단에
묻은 지풀일레
창을 내린
하행열차
곳간에 실린
한 마리 눈[雪] 속 양羊일레.

 

 


― 『강아지풀』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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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고은

 

 

내가 부른 노래
내가 부르지 못한 노래들이
우르르
불 켜들고 내달려오는
나일 줄이야
이 찬란한 후회가 나일 줄이야
 
 


-시집『어느 기념비』(민음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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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박두진

 

 

돌과 돌들이 굴러가다가 나를 두들기고,
모래와 모래가 쓸려가다가 나를 두들기고,
물결과 물결이 굽이치다가 나를 두들기고,
너무도 기나긴 억겁의 세월,
햇살과 햇살이 나를 두들기고,
달빛이 나를 두들기고,
깜깜한 밤들이 나를 두들기고,
별빛과 별빛이 나를 두들기고,
아, 훌훌한 낙화가
꽃잎이 나를 두들기고,
바람이 나를 두들기고,
가랑비 나를 두들기고,
싸락눈 함박눈 진눈깨비가 나를 두들기고,
싸락눈 함박눈 눈보라가 나를 두들기고,
우박이 나를 두들기고,
그 분노가 나를 두들기고,
회의와 불안,
고독이 나를 두들기고,
절망이 나를 두들기고,
아니 사랑이 나를 두들기고.
끝없는 뉘우침
끝없는 기가림
갈망이 나를 두들기고
양심과 정의. 지성이 나를 두들기고,
진리와 평화
자유가 나를 두들기고
겨레가 나를 두들기고
끝없는 아름다움
예술이 나를 두들기고
나사렛 예수
주 그리스도와 하느님,
말씀이 나를 두들기고.

 

 


―『속(續)촵수석열전(水石列傳)』(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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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임영조

 

 

어느덧 사십 년 지나
골동품 다 돼가는 자물통 하나
묵비권을 행사하듯 자물통 하나
묵비권을 행사하듯 늘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하지만
뜻 맞는 상대와 내통하면
언제든 찰칵!
꼭꼭 잠가둔 마음을 푼다
천성이 너무 솔직하고 순진해
안 보여도 좋을 속까지
모조리 내보이는 자물통 하나
가슴속엔 싸늘한 뇌관을 품고
보수냐? 개혁이냐?
목하 고민 중인 자물통 하나
남의 집 문고리에 매달려
알게 모르게 녹슬고 있다.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1(제3시집)』(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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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정희성

 

 

어느 천재 시인이 일필휘지로
하루저녁에 휘갈려 쓴 시집 한 권을
읽고 읽고 또 소리 내 읽는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석 달 열흘이 걸려서야 다 읽었다
이 귀신이 필경
내가 미치는 꼴을 보고 싶겠지
낯선 거울 앞에서 나도
귀를 잘라버리고 싶다

 

 

 

-시집『돌아다보면 문득』(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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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척간두의 까치 낯짝
- 자화상
 

고형렬

 

 

정월 삭풍에 잔가지 공중에서 흔들, 할 때면
이 대낮에 여보게, 대체 하늘에서 뭘 하시나
그 얼굴 말고 더 찾아볼 게 세상 뭬 있겠는가
그것 가지고 노는 것보다 좋은 게 또 있겠나
혹시나 혼자 거울 들고 보고 있진 않으시겠지?
설마하니 지가 지 정신치료 하고 있진 않겠지
 

 

 

-시집『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창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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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김상미

 

 

먹이를 찾아 헤매던 사자가 나를 덥석 물었습니다
나는 활짝 열린 사자의 잔인한 입 속으로
빨려들어 갔습니다
사자는 꽃 씹듯이 나를 씹었습니다
붉디붉은 사장의 입에서 황홀한 침들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처음부터 사자는 내가 꽃인 걸 알았을까요?
내 마음이 언제나 꽃피는 봄날처럼 붉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몸 전체가 불타는 심장인 걸 알았을까요?


꽃 먹듯이 나를 먹어치우는 사자의 이빨에 끼여
아아, 나는 햄릿과 오필리아의 마지막 세계를 바라봅니다
연인들의 꽃밭에서 딴 알몸의 꽃 한 송이,
그 핏물 섞인 일심동체의 잔혹함을!

 

 


-시집『잡히지 않는 나비』(천년의시작,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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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畵像

  
마종기

 

 

흰색을 많이 쓰는 화가가
겨울 해변에 서 있다.
파도가 씻어버린 화면에
눈처럼 내리는 눈,
어제 내린 눈을 덮어서
어제와 오늘이 내일이 된다.


사랑하고 믿으면, 우리는
모든 실체에서 해방된다.
실패한 짧은 혁명같이
젊은이는 시간 밖으로 걸어나가고
백발이 되어 돌아오는 우리들의 꿈,
움직이는 물은 쉽게 얼지 않는다.
그 추위가 키워준 내 신명의 춤사위.

 

 


-시집『이슬의 눈』(문학과지성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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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박형진

 


마당 앞에 풀이나 뽑느라
아무것도 못 했어

거울 앞에 서면


웬 낯선 사내


오십 넘겼지 아마?


 

 

-시집『콩밭에서』(보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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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견생견사


김화순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개다

행복하거나 지루하거나 슬플 때마다 나는

개처럼 뒹굴거나 꼬리를 말아 쥐고 납작 웅크렸다

내가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게 된 것도

환상을 야금야금 즐기게 된 것도

모두 개 덕분이다

 
편견, 선입견, 발견, 혹은 광견들은

먹이를 위해 아양 떠는 법과

하얀 배를 보여주며 굴복하는 법과

나를 향해 컹컹 짖는 법을 알려주었다

사랑이 떠났을 때 나는 광견처럼

질문과 욕설을 질질 흘리며 나를 깨물고 발길질했다

엄마가 은하계 어느 별로 여행을 떠났을 때 

빈자리 가득 채운 만 개의 죽음을 발견했다

선입견은 내 마음의 꼬리를 슬쩍 감추게 했고

참견은 졸졸 따라다니며 딸처럼 간섭을 했고

편견은 절뚝이며 시간을 건너게 했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새끼 치는 개들

그 중 일견과 선견의 선연한 눈빛은

심연의 바다 속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다

참, 유난히 내 품을 파고들던 개가

털색이 하얀 백무늬불여일견이었나?

수심을 알 수 없던 까만 눈의 백문이불여일견이었나?

개 같은 내 인생

개처럼 헐떡거리며 나, 여기 까지 왔다

 

 

 

―웹진『시인광장』 (201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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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황성희

  


무엇으로 이 얼굴을 설명할까
지우개 자전거와 바람 나무 새
해가 뜨면 세 번 아침 점심 저녁
엄마라고 부르는 시간
나뭇잎을 흔드는 게 바람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하루라고 부르는 이것은
이 공포와 지겨움과 평화는
안과 밖이 공존하는 이 유리상자는
무엇일까 한 얼굴 속 두 개의 눈동자는
어깨를 치는 이 사람들과 작별 인사는
검은 눈물로 만든 길과 채찍 자국은
무엇일까 모르면서 이 아는척 하는 것은
없으면서 있는 척 옷을 걸치는 것은
태양이 지나가는 길 위로
사과는 사과로 사과를 속이고
너 때문이야 너 말을 할 줄 아는 너
눈동자를 찌른 것은 고맙게도 나
유리창 속 실금을 내며 깨지는 입
무엇으로 이 비명을 설명할까

 

 

 

ㅡ계간『시와 반시』(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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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자화상

 

장 석 남

 

 

그 물가에 갈 수 없으므로

그 물가를 생각한다

그 물가에 선 생각을 하고

그 물가의 풍경을 생각한다

물소리를 생각한다

그리움 따위는 분명 아니고 기운 떨어지면 찾아오는

향수 같은 것도 아니고

그보다는 깊은, 그보다는 더 해맑은 것이

나를 데려간다

나는 천상 회고파(回顧派)지만

그곳에서는 회고파만은 아니다

어느덧 그 물소리 속 수레바퀴들이 나를 실어

석양을 앞질러 간다

갈잎과 바람을 넘어

기러기들의 순례를 넘어간다

빛의 화살 끝에 묻어 어느 별을 뚫고

죄를 뚫는다

 

허나 이내 나는 그 수레 위에 있지 않고

그저 그대로 그 물가에 서서

어느새 밑단이 젖은 바지를 걷고 서서

물소리를 바라본다

그 물가에 서 있는 나를 나는

생각한다

그리움도 향수도 아닌 그보다도 더

해맑은 것이 나를 안아다

그 물가에 놓는다

그 물가를 생각한다

 

 

 

- 장석남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 20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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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자화상

 

김중일

 

 

 



   허밍, 내 코끝을 맴도는 밤의 냄새 같은

   캔버스 위를 허밍처럼 흩날리는 붉은 비

 


   비오는 날 침대 위에 수북이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들은 나를 그리던 세필의 흔적. 일생을 떠도는 허밍 같은 나를 스케치한 흔적. 베개 위에 머리카락은 매일 잠에서 깨면 몸 안에서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망령 같은 내 밑그림의 흔적. 나는 잠시 나로 채색되어 있을 뿐. 내가 지난 계절 귀뚜라미로 밤새 흥얼거렸던 허밍은, 먼 대륙까지 날아가 잡풀로 무수히 웃자라 있다. 팔레트 한 쪽에 덜어놓은 물감덩어리 같은 대초원의 양떼들이 그 잡풀 속에, 내가 쏟아낸 허밍 속에 코를 박고, 듣다가 울다가 울다가 뜯다가 하며 검게 뒤섞이는 밤. 나는 하얗게 튼 입술의 사시나무로, 긴 머리 까만 발의 밤들을 기분 따라 바꿔가며 빙글빙글 바람의 왈츠를 추고. 나는 찬 밤을 입에서 입으로 하얀 입김처럼 떠도는 허밍. 분명히 다 불렀는데 끝내 끝나지 않는 허밍. 나는 허밍으로 짜여진 새털방석에 앉아 간지러운 궁둥이를 들썩거리고, 고독의 긴 손가락으로 적막을 가르며 드럼을 단 한번 격렬하게 내려친다. 낙뢰가 구름을 치듯. 퐈아앙앙치이이익.

 


   확 타올랐던 불길 위로

   오늘도 다 잡쳤다는 분노의 붓질처럼 시커먼 폭우가

   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짓뭉개듯 내리긋고 있다.

 

 

 


-월간『현대시』(2011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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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박지우

 

 
  1.죽음

  꿈을 읽는 여자가 행선지가 다른 바람을 만져요 죽음은 존재하지 않
는다고 다만 시간의 장난일 뿐이라고 흐트러진 얼굴이 사물의 잠속으로
빠져들어요

 

  2.또 하나의 생

  에곤 실레의 생을 마셔요 시간을 마셔요 백 년 전 슬픔을 마셔요 낯
선 생이 입 안 가득해요 그림자놀이를 해요 웃지 않는 그림자들이 벽
에 쌓여요

 

  3.기억

  의자가 의자에 앉아요 무릎에 무릎이 앉아요 에곤 실레가 걸려있는
어둠 속 얼굴이 흘러내려요 

 

 

* 어느 때였던가! 생의 한 가닥을 정리하려고 했던 시절이 있었다.

열아홉 이였던가. 스물하고도 다섯 이였던가. 철교 위에서 흔들리는

강물을 바라보던 때 에곤 실레의「자화상」을 만났다

그때 다시 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웹진『시인광장』(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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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2
-자화상 다친 사슴

 

이선

 


보름달을 삼킨, 앞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별들의 왕녀인 안드로메다가 가장 사랑한,

라임나무 열매를 훔쳐 먹은 죄로, 나는 노새사슴이 되었다

목자자리, 아르크투르스 별을 영원히 짝사랑하라는 벌을 받았다,

“디에고 리베라”

휘핑크림 바른 라임 파이(Lime pie), 

혀끝에 부드럽게 감기는, 한 조각

이름


노새사슴 몸통은, 사냥꾼들의 표적

목에 꽂힌 화살

허리에 박힌 화살

나는 신음소리를 뱉지 않고, 꿀꺽 삼킨다


달빛 커텐, 내 눈을 가리는 밤

내 뿔은 1cm씩, 나의 별을 향해 그리움을 키운다


“내 몸에 박힌 화살을 빼지 마세요‥제발”

-상처는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붓

-고통은 잘 섞은, 물감

배경처럼 서 있는 멕시코만, 푸른 바다

남색꽃 만발한, 클리토리아 초원


다시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은 마피미 분지에 내던지고

말랑말랑, 새 뿔 왕관으로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릴 터,

-귀를 쫑긋 세우고

 

 

* 프리다 칼로: 1907년 멕시코 태생의 초현실주의 화가. 전차 사고 후
척추장애로 걷지 못함. 멕시코 민중화가‘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하였
으나 평생 남편 바람기로 갈등. 칼로의 그림은 르부르 박물관에 전시되
고, 모두 멕시코 국보로 지정되었음.

 

 


-월간『시문학』(201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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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시를 지나는 자화상

 

이민하 

 

 

반쯤 감긴 눈으로 나는 걸었다

사과처럼 부릅뜬 눈으로 닿을 수 없는 곳

자작나무 숲은 얼마나 먼가

당신은 꼭꼭 숨어 해먹 위에서 잠들었다

나는 열두 시에 도착했다

안개를 들추고 숨을 죽였다

이마 위의 그림자를 쓸어 올리며 당신은 실눈을 떴다

낡고 빛바랜 청포장이 지평선까지 흘러내렸다

젓가락처럼 식도를 모아 브런치를 나누고

나는 햇잎으로 입을 훔치며 오후의 거리로 내려왔다

숨바꼭질하는 연인들의 미로원을 지나

불빛 군무를 따라 식칼들이 합주를 하는

나선형의 저녁 지붕들을 돌아

장마철에도 나는 숲길을 올라갔다

빗줄기가 신발에 갈고리를 걸고 예인선처럼 끌었다

나는 열두 시에 도착했다

눈꺼풀 위로 기어가는 빗방울을 개미처럼 튕기며 당신은 잠들었다

해먹 위에 우산을 씌워 주고 돌아와

어제는 자전거를 타고 갔다

달려가는 트렁크에 히치하이크한 날도 있다

심장에 낀 살얼음을 긁으면서도 갔다

자면서도 나는 우편낭을 챙겼다

뿌옇게 까맣게 그을음이 끼는 정오와 자정

자면서도 당신은 편지를 쓰고 있었다

공중에서 머리칼들이 떨어져 글자들 사이에 섞였다

바람의 잔이 떠다니고

발목만 땅에 묻힌 백골들이 빈속을 채우고 있었다

횃불을 든 마을 사람들이 왁자하게 몰려왔다

당신은 주섬주섬 자작나무 숲을 수레에 실었다

갈라지는 내 몸 위로 바퀴가 지나갔다

밤과 낮이 천천히 뒤집혔다

남아 있는 사람들 옆에 나뭇단이 쌓였다

한 사람씩 나무토막을 던지며 모닥불을 피우다 돌아갔다

아직 뜨거운 잔가지 하나를 침착하게 집어 올렸다

타다 만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반쯤 감긴 눈으로 나는 걸었다

  

 


―계간『포지션』(2013.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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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그려준 자화상

 

  안상학

 

  

  이 세상에서

  네가 가장 예뻐하는 것이 네 전생이란다

  그렇다고 손안에 넣지는 말아라

  손안에 가두는 순간

  후생에서는 그 아름다운 전생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다

  가령, 꽃이라든지, 혹은 그 무엇이든지

 

  지금 이 세상에서

  네가 가장 미워하는 것이 네 후생이라면 끔찍하지 않니

  후생에서 아름다운 전생을 두고두고 만나보려거든

  제발 손안에 거두어 보듬어라

  말하자면, 똥이라든지, 혹은 그무엇이든지

 

  모를 일 아니겠는가

  꽃들의 세계에선 지금 네가 꽃일지, 미안하게도

  꽃들이 킁킁대며 네 냄새를 맞고 있을지

 

  하지만, 아마도 꽃들은 내가 다음 세상에는 없어서 나를 더 이상 못 그릴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을 것이다 꽃들이야말로 내가 못하는 뿌리내리기를 터득한 지 이미 오랜 화상 아니겠는가

 

 

 
―시집『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실천문학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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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김언
  

 
첫 줄을 읽어 보면 알지 이 얼굴이 얼마나 못생긴 그림인지
가장 친한 친구들도 모르고 이웃집에 사는 개도 못 알아보는
이 표정을 네 살배기 우리 딸애는 단번에 알아차렸지 이건 아빠
이건 못생긴 이건 집에는 없는 물건이라는 걸
아무래도 실물과 다른 그 표정은 눈이 아니라 입 근처에서 모이고
입술 근처에서 튀어나온 표정은 이마 근처에서 다시 모이지
콧구멍은 없고 콧날은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만틈
훼손되어서 턱을 괴고 있는 모습 이건 아빠
이건 집에는 필요 없는 물건이라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주면
신기하게도 다시 튀어나와서 짖는다 옆집의 개처럼
대문 밖에만 나서면

 

 


-계간『시작』(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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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이미란

 

 

 

            어떤 모반을 꿈꾸며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해보지 않은 자라면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것,

               어느 모멸에 맞서기에 앞서 서둘러 화장을 고쳐야 했던 자의 떨리던 입술선 그런 것,

                                                         언제나 잠시도 같지 않는 바람 속에 서 있는 그런 것,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런 것들이다.

                                                                -이신조 소설 <나의 검정 그물 스타킹>중에서-

 

 

 

 

 

발랄하고 가파른 나르시스의 언덕

열정과 눈물의 지평선을 아시는지

권태의 갑옷으로 무장한 카타르시스의 알몸

취하지 못한 강강술래의 달빛 그런 것

 

인연의 산책에도 어둠의 중심은 있는 것인가

나의 혀는 극과 극의 텅 빈 창문이었던가

숨겨진 정서로 거품처럼 일렁이다 돌아서면

첨벙대며 끈질기게 펄럭이던 치욕의 깃발

 

순정한 욕망의 늪을 간직한 죄로 늘 외로웠나니

십자로의 모퉁이마다 흩날리던 짧은 꽃잎이여

도리질로 흘러간 슬픔의 강물이여

읽다만 통속의 서정에 얇은 밑줄이나 그으며

남모르게 키워온 것 팔 할의 절망이었다

 

대낮의 광장 같은 지루한 생이었느니

맞서기도 전에 이해한 투명 립스틱의 향기 그런 것

욱신거리는 불면으로 뒤척이던 사랑니의 세월이었다

잦아들며 흐린 듯 고개를 들면 거기

 

눈물나게 먹먹한 충만의 시간을 아시는지

빛과 어둠이 아름답게 몸을 섞는 초저녁 풍경과

그 하늘 아래 살고 있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

천형의 커다란 눈망울 속에 지평선이나 피우며

서러운 그대들의 레지스탕스가 되고 싶었다

 

 

 

-시집『내 남자의 사랑법』(황금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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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공광규

 

 

밥을 구하러 종각역에 내려서 청계천 건너

다동 빌딩숲을 왔다갔다가 한 것이 이십 년이 넘었다

그러는 동안 내 얼굴도

도심의 흰 건물처럼 낡고 때가 끼었다

인사동 낙원동 밥집과 술집으로 광화문 찾집으로

이런 심심한 인생에

늘어난 것은 주름과 뱃살과 흰 머리카락이다

남의 비위를 맞추며 산 것이 반이 넘고

나한테 거짓말을 한 것이 반이 넘는다

그러니 나는 가짜다 껍데기다

올해 초파일 절에서부터 오후 내내 마신 막걸리가

엄지발가락에 통풍을 데리고 와서

몸이 많이 기울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제는 사무실 가까이 와서 저녁을 먹고 간 딸이

아빠 얼굴이 가엽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나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가 똑같다

안구에 바람이 불고 돋보기가 있어야 읽고 쓰는데 편하다

맑은 날에도 별이 흐리다

눈이 침침한 것은 밖을 보는 것을 적게 하라는

몸의 뜻인지도 모르겠다

광교 난간에 기대어 청계천을 내려다가 보는데

얼굴 윤곽이 뭉개진

물살에 일그러진 그림자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ㅡ월간『좋은시 2015』(삶과 꿈,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