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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영의 詩

향기로운 재스민 2018. 2. 13. 20:07

* 박서영 / 1968년 경남 고성 출생.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좋은 구름』.

 

 

 

 

 

업어 준다는 것

 

 

박서영

 

 

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

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등이 흠뻑 젖어들고 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염소와 눈을 맞추며

자장가까지 흥얼거렸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 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

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아주는 일

 

사람이 짐승을 업고 긴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한없이 가벼워진 몸이

젖어 더욱 무거워진 몸을 업어 주고 있다

울음이 불룩한 무덤에 스며드는 것 같다

 

 [시가 있는 아침] 업어준다는 것 / 박서영

 

 

 

 

 

은신처 (외 2편)

 

박서영

 

숨을 곳을 찾았다

검은 펄 속에 구멍을 내고 숨은 지렁이처럼

침묵은 아름다워지려고 입술을 다물었을까

분홍 지렁이의 울음을 들은 자들은

키스의 입구를 본 사람들이다

그곳으로 깊이 말려 들어간 사랑은

흰 나무들이 서 있는 숲에서 통증을 앓는다

입술 안에 사랑이 산다

하루에도 열두 번

몸을 뒤집는 붉은 짐승과 함께.

 

 

 

 

봄날 저녁의 수채(水彩)

 

가난한 지붕은 어쩌다가 가난한 지붕을 가졌을까 하고,

하늘펜션과 별빛펜션은 어쩌다가 하늘과 별을 가졌을까 하고,

 

펜션의 반짝이는 불빛 옆, 불 꺼진 지붕들은 누가 주인일까 하고,

 

계절과 계절의 경계는 수채처럼 번지고 뒤섞여

겨울인지 봄인지, 시간은 접었다가 펼치기를 반복한다

삼월에도 일어나지 않는 개구리를 깨우거나

땅을 몇 번 두드려 송이버섯을 잠에서 깨어나게도 한다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봄을 깨우고 있는 것일까

이 세상의 모든 어휘들은 반쯤은 따뜻하고 반쯤은 차갑다

반쯤은 말랑말랑하고 반쯤은 딱딱하다

 

어둠의 실루엣들이 뒤섞여 흐릿해지니 좋다

겨울 지나 봄이라고 고로쇠 물 한 통 비우고 나오는데

여름과 가을이 내 몸의 연장통에서 심장을 꺼내 달아난다

 

심장은 방금 지나쳐 온 천막집 의자에 앉아 뛰고 있다

불 꺼진 천막집은 어쩌다가 궁핍한 추억을 가졌을까 하고,

비 내리면 계절은 번지고 뒤섞여 왜 수채(水彩)가 되는가 하고,

 

 

 

 

 

좋은 구름

 

좋은 구름이 있다고 했다. 사진작가들은 그런 걸 찾아 떠난다고 했다. 빈 들에 나가 여자를 불렀다. 사랑스러운 여자는 화장하고 옷 차려입느라 늦게 나갔다. 사진작가는 버럭버럭 화를 냈다. 좋은 구름이 떠나버려서, 좋은 구름이 빈 들과 여자를 남겨두고 떠나버려서.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고 여자는 오래 빈 들에 서서 보았다. 사자와 치타. 새와 꽃. 눈물과 얼룩. 구름 속에서 자꾸 구름 아닌 것들이 쏟아졌다. 남자는 화가 나서 떠나갔다. 한 프레임 속에 좋은 구름과 빈 들과 여자를 넣지 못해서.

 

좋은 노을이 있다고 했다. 사진작가들은 그런 걸 찾아 뛰쳐나간다고 했다. 다리 위에 서서 여자를 불렀다. 여자는 또 노을이 떠나버릴까 봐 화장도 하지 않고 서둘렀다. 여자가 헐레벌떡 뛰어 노을 앞에 서자 사진작가는 또다시 화를 내며 떠나갔다. 좋은 노을이 떠나버려서, 좋은 노을이 강물과 여자를 남겨두고 떠나버려서. 땀에 흠뻑 젖은 여자는 다리 위에 서서 보았다. 사과밭 위로 기러기가 날아갔다.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붉은 구름이 흩어지고 기러기가 울었다. 노을 속에서 자꾸 노을 아닌 것들이 쏟아졌다. 이별의 순간에도 저런 멋진 장면이 연출되다니. 집에서는 혼자 두고 온 아이가 울고 있을 텐데.

 

여자는 바뀐 장면들을 떠올렸다. 언제나 뛰어오느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구름과 노을 사이의 핏자국. 후드득 새의 깃털들. 여자는 총성이 자욱한 빈 들판에 서 있었다. 여기저기 기러기들이 떨어지는 소리 들렸다. 빛이 쉬지 않고 풍경을 찍어댔다. 하늘의 뱃가죽에서 구름이 퍽퍽 떨어졌다. 구름과 노을과 여자의 심장이 한 프레임 속에 찍혔다. 천국의 아편 같은 구름이 빈 들에 내려왔다. 남자가 떠나자 비로소 좋은 구름이 여자의 혀 밑을 파고들었다. 키스는 얼굴의 불안을 심장으로 옮긴다. 이렇게 멋진 배신의 순간, 집에 두고 온 아이가 생각나다니!

 

—시집『좋은 구름』(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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