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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종다리의 노래/손석희

향기로운 재스민 2018. 10. 29. 09:33



풀종다리의 노래/ 손석희

 

가자 우리 모두

닫힌 입 열어주고

막힌 귀 뚫어주는

노래 부르러

휘리리리 휘리리리

 

- 에세이집 풀종다리의 노래(역사비평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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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 에세이집인 <풀종다리의 노래>는 손석희 앵커의 유일한 단독 저서다. 1993115일 초판을 찍은 이 책은 정가가 6천원인데 지금 그 돈으로는 이 책을 구하기 어렵다. 한때는 중고책방에서 5만 원 선에 거래되곤 했지만 그마저도 종적을 감추었다.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이 마구 찍어 뿌려온 사방에 굴러다니는 그런 책들과는 달리 희귀본이 되었다. 그런데 책속의 풀종다리란 동화를 쓴 원작자는 손석희 자신이 아니라 동화작가이기도 한 부산 MBC 배익천 조합원이었다. 그는 손석희 앵커가 구속 상태에서 석방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보내온 편지에서 풀종다리를 언급했다.


풀종다리는 귀뚜라미 과 풀벌레다. 하찮은 풀벌레들의 노래 소리가 모여 함성이 되고 결국 우리 자신과 우리 모두의 운명이 된다는 사실을 손석희 앵커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손석희를 또렷이 기억에서 각인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의 MBC 노조파업과 그 시기를 같이 한다. 19929월부터 50여 일간 뉴스, 드라마의 제작거부 등 전면파업에 돌입했던 와중에서 그가 노조원으로 참여했고 결국 그 이유로 구속수감까지 되었던 일이다. 그가 푸른 수의를 입고 포승에 묶인 채 맑게 웃는 모습의 사진을 기억한다. 그는 그것 때문에 석방된 뒤에도 몇 년을 메인프로그램에서 배제되어 나오지 못했다.


그는 책에서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소상히 전하려고 애썼고 방송민주화와 사회민주화에 대한 감성적이지만 방송인으로서의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다. 책에는 방송 뒷얘기와 함께 평범한 가장의 소소한 일상도 담았다. 책의 서문 맨 앞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전깃불이 나가버린 날, 촛불을 켜고 밥상 앞에 둘러앉았을 때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나 역시 세상에 쫓긴다는 핑계로 한동안 마주보지 않았던 어머니의 얼굴. 나는 그 얼굴에 차곡차곡 접혀져 쌓여있는 어머니의 간단치 않았던 삶의 주름살을 촛불 앞에서 비로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촛불이 만들어낸 깊은 그늘 속, 내 어머니의 수심들 가운데는 나에게서 비롯된 것도 상당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더 이상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 책을 드릴 때는 조금은 고개를 들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지금 손석희 앵커의 어머니는 홀로 목동의 조그만 아파트 1층에서 앞뜰을 타샤의 정원처럼 가꾸며 89세의 연세임에도 일주일에 두 번 구청에서 마련한 영어와 중국어 강좌를 들으며 건강하게 지내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뉴스를 통해 만나는 손석희 앵커는 환갑을 훌쩍 지난 나이임에도 여전히 샤방샤방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그의 일목요연하게 정돈된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믿음을 갖게 하고 실제로 언행이 일치된 사람임을 직감할 수가 있다. 그런 그도 방송 바깥에서는 점잖은 말만 골라 쓰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욕도 할 줄 알고, 화가 나면 앞뒤 안 가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인간임을 고백한다. MBC출신 여러 정치인과는 달리 정치권으로 넘어가지 않은 것도 그를 미덥게 하는 부분이다. 매년 실시하는 대국민 설문조사에서 손석희 앵커는 14년째 연속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신뢰하는 언론인 부문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몇 년 전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그저 "오래 했기 때문"이라며 겸손함을 나타냈다. 오래됨은 일관성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가 처음 JTBC로 간다고 했을 때 일각의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에게 있어 어쩌면 가장 어렵고도 큰 덕목이라 할 그 한결같음을 지켜나갔다. 그 절제되고 균형 잡힌 일관성과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가 끝없이 침몰해가던 대한민국을 건져 올렸다. 그가 공개한 '최순실 태블릿PC'가 도화선이 되어 오늘 촛불혁명 2주년을 맞았다. 다시 노 저어 희망찬 항해를 새로 시작하기 위해 가자 우리 모두’ ‘닫힌 입 열어주고 막힌 귀 뚫어주는’ ‘노래 부르러’ ‘휘리리리 휘리리리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