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하늘

[스크랩] 안개 속 풍경 / 정끝별

향기로운 재스민 2012. 2. 2. 05:08

 

 

안개 속 풍경 / 정끝별

 

 

깜깜한 식솔들을 한 짐 가득 등에 지고

아버진 이 안개를 어떻게 건너셨어요?

닿는 순간 모든 것을 녹아내리게 하는

이 굴젓 같은 막막함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부푼 개의 혀들이 소리없이 컹컹 거려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발 앞을

위태로이 달려가는 두 살배기는

무섭니? 하면 아니 안 무서워요 하는데요

아버지 난 어디를 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바람 속에서는 바다와 별과 나무,

당신의 냄새가 묻어 와요

이 안개 너머에는 당신 등허리처럼 넓은

등나무 한 그루 들보처럼 서 있는 거지요?

깜박 깜박 젖은 잠에서 깨어나면

어느덧 안개와 한몸되어 백내장이 된

우우 당신의 따뜻한 눈이 보여요

덜커덩 덜컹 화물열차가 지나가요

그곳엔 당신의 등꽃 푸르게 피어 있는 거지요?

나무가 있으니 길도 있는 거지요?

무섭니? 물어주시면

아니 안 무서워요! 큰 소리로 대답할게요

이 안개 속엔 아직 이름도 모른 채 심어논

내 어린 나무 한 그루가 짠하게 자라는걸요!

나무는 언제나 나무인걸요!

 

- 시집 흰 책(민음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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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는 아버지를 찾아 나선 남매의 여정을 그린 로드무비 <안개 속의 풍경>이란 영화를 보고 그 영감으로 쓴 작품이다. 시인은 "그 영화는 내게 영화라기보다는 한없이 척박하고 한없이 막막하고 한없이 습습했던 한 편의 회화이자 한 편의 음악으로 기억됐다"고 말했다.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불라와 알렉산더 남매는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아빠를 찾아 무작정 북쪽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탄다. 기차에서 내려 하염없이 걸어 여행을 계속하다가 트럭을 얻어 타지만 난폭한 운전사에 의해 어린 소녀 불라는 트럭 안에서 강간을 당한다.

 

 그리고 결혼식 날 슬피 우는 신부와 거리에서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죽어가는 말, 뿔뿔이 흩어지는 유랑극단 등 슬프고 우수에 찬 그리스의 현실들이 두 남매의 여정을 스쳐간다. 유랑극단에서 일하는 오레스테스를 향한 첫사랑의 벅찬 감정을 경험한 불라는 강간의 상처와 첫사랑의 애틋함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오레스테스가 동성연애자임을 알게 된 불라는 절망하면서 그의 곁을 떠나고 아빠를 찾기 위한 여행은 계속된다.

 

 국경지대에 도착하여 여권이 없는 남매는 한밤중에 몰래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 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들을 향해 발사된 국경 수비대의 총소리. 어둠이 걷힌 후, 마치 환상 같은 안개 자욱한 풍경 속에서 어린 남매는 언덕 위의 아름드리나무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이 시는 앙겔로풀로스의 영상시를 몽환적인 텍스트로 풀어쓴 것에 불과하다. 영화에서의 섬세한 연출이 돋보였던 앙겔로풀로스 감독이 지난 1월 24일 영화를 찍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보도를 접하고 대뜸 이 영화와 시가 떠올랐다.

 

 

권순진.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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