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기차위의 쌀/향기로운 재스민 김방주

향기로운 재스민 2015. 11. 7. 10:22

 

 

The Saddest Thing 

 

 

기차위의 쌀

향기로운 재스민 김방주

 

어제 저녁 같이 옆에서 공부하던 짝인 편집장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전에 썼던 "기차위의 쌀" 시를 자세하게 수필로 써서 동인지에 올려보면 어떻겠느냐고 한다

부끄럽기도 하고 거짓말을 못하고 아름답게 꾸미기도 어려운 성격에

어떻게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몰라 망설이다가 어쩜

그녀를 도와주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그때를 더듬어본다

 

 

본적이 경북 선산이었던 나는 결혼하고 저절로 경북 봉화군으로 본적이 바뀌었지만

엄마는 시부모님과 동서 둘이  함께 살며 농사를 짓는 집에 시집을 가셨드랜다.

맏이인 엄마는 길쌈을 메고 한 동서는 바느질 담당, 나머지 동서는 큰솥에

불을 때야만 밥을 할 수 있었던 때이다.

아버지는 무슨 큰일을 뚜렷이 정하고 하는 일 없으면서도 세상을 향해 바쁜듯이 찾아 다니신 것 같다. 

그러시다 어찌어찌해서 수원 구천동에 집짓는 사람의 총무를 맡아 오신 듯하다.

아버지는 엄마와 나를 그 집에 살게 한후 본인은 또 어디로인지 흘러가는 방랑자인 채로 지내셨다.

작은 아버지네가 같이 살게 되면서부터 안방과 건너방을 내주게 되었다.

엄마와 나는 문간방에서 앉은뱅이 책상을 놓고 아버지는 어딘가에서 큰일을 하는 사람인가보다라는

마음으로 산 시간들이었다.

1.4후퇴이후 어떻게해서든지 아버지도 없이 사는 엄마와 나는 버틸 때까지 버텨본다는 생각으로 집에

남았다가 거의 막바지에 피난길을 나섰는가보다.

낮게 떠서 다니는 비행기 소리만 나면 무서워서 마당에 있다가도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서는

작은 나무찬장 아래 커다란 솥두껑 밑에  몸을 반쯤 가려 숨긴채  발발 떨던 기억이 난다  

어린나이에도 그 솥뚜겅이 제일 단단해서 총알이 뚫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나보다.

어느 날 마지막 피난 대열에 끼어든 우리는 기차를 타려다가 자리가 없어 기차 지붕 위에

작은 쌀자루를 얹고  그위에 엄마는 나를 앉히고서는 목적지도 없이 남으로 향했다.

그리 가다 가다 어디인가에 내려서 엄마는 작은 이불보따리와 쌀자루을 이고 그 옆에는

발뒤꿈치가 벗겨져 짓무른 아기 같은 소녀가 철로길 옆을 걷다가

어느 한적한 동네에 들어갔었다.

그 곳에서는 아직 어딘가로 떠나지 않아도 되었는지

중년의 아저씨와 아줌마는 기차위에서 저절로 황토색으로 볶아진 쌀 대신에

잡곡밥으로 밥을 해 주셨다.   모두가 힘들게 살고 양식도 귀하던 때

알지도 못하는 힘없는 모녀에게 베푼 따뜻한 인정은 이 나이 되도록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얼마를 있다가 세상이 좀 잠잠해질 때 그 아저씨는 우리를 수원집까지 데려다 주셨다.

 

살면서 아버지라고 불러본 기억은 단 한번 아홉살 때 하루였다.

어디를 어떻게 누구와 살았을까 상상해 볼때도 있지만

엄마는 아버지 몫까지 최선을 다해서 나를 키우셨다는 마음으로,

살아있는 동안 이제 나도 주위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는 삶으로 남고싶다.

점점 흐려지는 기억을 늦추어 가면서......

 

 

#549

2015. 11. 07  향기로운 재스민